몇 해 전 이야기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다가오던 어느 날, 나는 인사동에서 지인을 만난 후 즐겁게 쇼핑을 하고 귀가 중이었다. 인사동 가게들에서는 수공의 장신구, 수제 옷 등을 팔고 있어서 쉽게 발길을 멈추게 된다. 그날 안국역에서 3호선을 탄 다음 충무로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사당역으로 향했다. 강남 어귀에서 사는 나는 동선이 좋은 지하철 4호선을 타곤 한다. 그런데 사당에서 내릴 무렵, 있어야 할 귀걸이 한 쪽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신없이 지하철을 갈아타느라 귀걸이가 사라진 것을 느끼지 못했던 거다. 

실은 귀에 구멍을 뚫지 않아서 부착하는 귀걸이를 하다보니 언제라도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승객들 사이로 내가 서 있었던 지하철 공간을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귀걸이는 아무 데도 없었다. 하릴없이 사당역에서 지하철을 내리자 어느새 퇴근시간이 되었는지, 계단은 그야말로 인간의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나도 이미 몸과 마음이 지쳐서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도 그 귀걸이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다시 돌아섰다.

그 귀걸이로 말할 것 같으면 하얀 돌에 검은 두 줄의 선이 그어진 돌에 아주 빨간 대리석 질감의 다른 돌을 깎아 붙여 만든 것으로서, 그것을 구입했던 뮤지엄 가게 분의 말에 따르면 티베트에서 유래한 그 돌이 영적인 물건이라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리 고가는 아니었다. 나는 그 귀걸이를 매우 좋아해서 특별한 날에만 골라서 하곤 하였는데, 하필 그날 그 복잡한 지하철에서 잃어버렸던 것이다. 잠시 집으로 돌아가는 계단과 반대편 승강장 사이를 오가며 망설이다가 반대편 승강장의 지하철을 타버렸다. 잘 생각해 보니, 안국역에서 3호선을 탔을 때만 해도 귀걸이를 확인했던 것 같다. 그러면 아마도 3호선에서 내릴 때거나 4호선을 탈 즈음에 없어졌을 것 같았다. 즉, 충무로역이 핵심이다. 그렇더라도 지금 충무로역에 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시간에 충무로역에서 조그만 귀걸이를 찾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하지만 찾아보지도 않고 포기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 무작정 충무로역으로 향했다. 

충무로역에서 내린 뒤 내가 움직였던 동선을 따라 눈을 바닥에 고정한 채 귀걸이를 찾아보았다. 역 바닥은 참으로 깨끗하였다. 무언가 떨어져 있는 물건이라도 있다면 사람들의 눈과 발에 즉시 걸릴 듯이 바닥은 반들반들한 인조 대리석이거나 타일로 되어 있었다. 몇 번을 걷다보니 환경미화원도 만났다. 그에게 다른 한 쪽의 귀걸이를 보여주면서 혹시 이런 것을 못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청각장애인으로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으나 대충은 이해하면서, 그런 물건을 보지 못했고 ‘지금 막 다 청소를 마쳤다’고 표현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어깨를 치면서 분주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이제 어리석은 탐색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4호선 지하철을 탔던 승강장에 다가서는 순간, 내 생각보다 두 칸쯤 밑에서 탔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 아래로 가보니, 과연 미끄럼 방지를 위해 올록볼록한 블록처럼 생긴 노란 방지턱 사이에 그 ‘귀걸이’가 살포시 끼어있는 것 아닌가. 

마침 지하철이 미끄러지듯이 들어오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방지턱 사이에서 그 아이를 우아하게 구출해서 지하철을 탔다. 그사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귀걸이를 밟고 지나갔을까. 하지만 방지턱의 파인 부분에 자리 잡은 덕분인지 귀걸이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지 않았다. 다만 돌을 연결하는 철제 부분이 약간 휘어져 오늘날까지 그날의 상흔을 증언하고 있다. 귀걸이를 발견한 순간 너무 좋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마치 거기까지 가도록 부른 것이 바로 이 물건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건에도 영혼이 있을까. 적어도 이것을 만든 여러 사람들의 정성과 혼과 기억이 들어가 있을 터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통영에 갈 때마다 너무나 재미있고 우아한 자개 상품이며 누비 제품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자개를 만드는 장인들이 많지 않아서 요즘 물건이 옛날 물건만 못한 것 같고, 좋은 물건이 있다고 해도 매우 고가여서 자개를 사랑하는 나의 지인들은 중고매장을 누비고 다닌다. 누비는 매우 가볍고도 견고하며 천의 특성에 따라 아름답게 변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데도 누비를 새롭게 접근하는 새로운 세대들이 육성되는 것 같지 않다. 

나는 루이뷔통을 능가하는 통영 누비의 명품성을 상상해 본다. 왜 이런 ‘전통’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끼고 새롭게 해석하는 데 적극적인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일까. 왜 흥미진진하고 미래지향적이고 친환경적인 상품개발 콘테스트 같은 것을 대대적으로 벌이지 않는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혹은 열리고 있는데 나만 모르는 것인가). 

영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애정을 불러들여서 사람들 사이에도 다리를 놓을 것이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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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