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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항쟁이 35돌을 맞았다. 5·18 항쟁 하면 제일 먼저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일어났던 군인에 의한 집단발포가 떠오른다. 1995년에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한 청년은 이렇게 절규하며 시민군에 뛰어든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총으로 국민을 쏘는 군인에게 그러면 안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하던 군중을 향해 애국가를 울리며 총을 겨눈 그날의 발포 명령자는 지금도 밝혀져 있지 않다. 5·18 항쟁을 짓밟고 들어선 전두환 정부는 무고한 국민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목숨까지 앗아갔다. 군부 독재가 이어지면서 국민의 온전한 생명과 삶을 앗아가는 국가폭력도 계속됐던 것이다.

‘87년 체제’란 말이 있듯이 현대사에서 1987년 6월 항쟁은 민주화 시대의 개막을 상징한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건대, 민주화는 과거사 청산으로 시작된다. 민주정부가 들어서 독재 권력이 자행한 국가폭력의 진상을 규명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에게 사과와 배·보상을 하면서 민주화의 첫발을 내디딘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다른 길을 갔다. 6월 항쟁의 요구는 관철되었으나, 민주정부가 들어서지는 못했다.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5·18 항쟁을 진압한 군부 지도자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태생적 한계로 인해 노태우 정부의 과거사 청산은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을 백담사에 유배하고 국회에서 5·18 항쟁 관련 청문회를 여는 데 그치고 말았다.

과거사 청산을 대신하여 민주화의 출발점을 뜨겁게 달군 것은 6월 항쟁으로 승리했으나 권력을 잡지 못한 민주화 세력과 냉전과 독재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려왔던 보수세력 간의 힘겨루기였다. 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인 강경대가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다. 5·18 항쟁에서 6월 항쟁까지 고귀한 생명들의 희생을 대가로 민주화를 이루어냈건만, 또다시 대학생이 국가폭력에 희생되는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절망과 분노에 대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서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전남대생 박승희를 비롯한 10여명은 분신으로 항거했다. 5월8일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인 김기설이 서강대에서 분신했다. 서강대 총장 박홍은 그날로 기자회견을 열어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며 분신배후설을 주장했다. 정구영 검찰총장도 곧바로 “최근의 분신자살 사건에 조직적인 배후세력이 개입하고 있는지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검찰에 지시했다.

조선일보는 5월10일자 사설 ‘박홍 총장의 경고’에서 “그의 말대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자살 소동에는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의문점이 개재한다는 점을 강하게 느낀다”고 썼다. “자살과 시신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죽음의 세력이 있다면 생명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점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사건 직후 대학총장, 검찰총장, 언론이 일제히 제기한 분신배후 ‘설’은 곧 검찰에 의해 유서대필이라는 ‘범죄’로 재구성되었다. 전민련 총무부장인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5월 민주화운동의 열기에 위기감을 느끼던 보수세력의 반격이 시작됐다. 6월3일에 일어난 ‘정원식 총리 서리 밀가루 폭력 사건’까지 덧대어 보수세력은 민주화 세력에 반인권과 반인륜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며 파상공세를 펼쳤다. 마침내 6월20일 광역의회 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자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김기설 유서대필사건 관련, 출소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강기훈 (출처 : 경향DB)


그로부터 24년이 흘렀다. 2015년 5월14일 대법원은 유서대필 사건 재심에서 강기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무고한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반인권적인 국가폭력이 버젓이 자행되었음을 공증한 셈이다. 여기에는 독재 시절처럼 공권력이 앞장서는 데 그치지 않고 언론과 지식인 등 보수세력이 가담했다.

민주화 시대에는 권력 독점이 불가능하다. 보수세력은 이를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실제로 1998년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그들은 ‘잃어버린 10년’을 살았다.

보수세력은 지금도 권력 독점과 기득권 수호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고 무고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국가폭력을 정략적으로 방조하거나 두둔하고 있다. 이것이 민주화 시대에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과 같은 국가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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