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원의 죽음에 반응하고 애도하는 방식은 한 사회의 품격과 문화의 수준을 바닥까지 보여준다.

노회찬 의원의 자살이 야기한 여러 가지 반응과 우리 모습도 실로 깊이 성찰되고 기억될 만하다. 거기에도 ‘헬조선’의 캄캄한 심연과 거기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슬픔과 분노가 병치되어 있다.

자살과 애도 문제에 대한 홍준표 부류 정치인들의 무지는 차치하고, 나에겐 특히 노회찬 의원의 죽음 다음 날 조선일보의 1면 편집이 충격이었다. 이는 고인의 죽음을 그것도 어린 야구 선수들의 사진을 이용하여 능욕했을 뿐 아니라, 슬퍼하는 많은 시민들을 조롱하기도 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 사회의 엘리트들이 운영해온 ‘1등 신문’이라 한다. 그들이 가진 높은 학벌과 많은 지식이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리도 증오와 조롱에 소용되는가? 또 얼마 전 새삼스럽게 세간에 충격을 준 ‘재기해’ ‘태일해’ 같은 참람한 언어도 기억한다. 자살과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일베나 워마드의 태도는 조선일보 7월24일자 제1면과 얼마나 큰 거리를 갖고 있을까? ‘재기해’ ‘태일해’는 대체 어디서 왔을까?

우선은 동료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 사람의 생과 죽음에 대한 무식, ‘인간성’과 언어의 빈곤들일 것이다. 그런데 점점 보통의 사람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잔인성보다 더 안타깝고도 새로운 것은, 그 모두를 느끼고 알면서도(?) 자극과 공격을 위해 일부러 취하는 위악과 ‘관종’의 황폐한 정신 상태겠다. 그러면 그것은 또 어디서 왔을까? 만약 일베나 워마드의 언동이 이 같은 상태 때문에 분노와 조롱 외에는 눈에 안 뵈는 철없음의 발로라 한다면, 이 사회에는 그보다 더 무자비한 진영 논리와 타인을 향한 적대가 횡행하고 그것이 소위 ‘정치’라는 것으로 돼 있다.

사실 정치이념과 패당은 죽음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애도를 가로막는 현실의 힘이다. 누구도 거기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우리는 타자와 ‘적’의 고통에 더 무심·무감각하다. 애도는 하찮은 이념과 물리적 거리 따위에도 영향 받으며, 어떤 죽음은 아예 눈에 뵈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가 설사 누군가가 보기에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악인이나 ‘적’이라 해도, 죽음 앞에서는, 또 자살 앞에서는 산 자는 멈추고 자제해야 한다. 모든 죽음이 무지막지한 권능으로써 존재함의 허무와 존재자가 걸치는 업보와, 돈과 아파트와, 허명과 학벌의 허망을 가르쳐주지만, 자살은 특히 사회의 비참과 관계의 한계를 증거한다. 도덕적 궁지에서, 고독의 상황에서만, 자살은 발생한다. 생의 모든 순간이 죽어 마땅하게 이뤄진 그런 인간은 없고, 누구도 타인을 향해 ‘재기해’ 따위를 입 밖에 낼 권리가 없다.

우리는 ‘슬퍼하는 이와 함께 슬퍼하라’ 같은 성현의 가르침을 지킬 능력이나 ‘적’이나 먼 타인의 영혼마저 연민할 깊이를 못 가진 범속한 인간이기에, 그들의 죽음 앞에서는 그냥 잠시 멈추고 묵례하면 될 듯하다. 침묵이 증오와 비참을 그나마 줄이고, 무엇보다 결국 죽음을 피치 못할 우리 가련한 영혼을 더 비루하게 만들지 않는 방법인 듯하다. 

홀로 결정하고 자기의 몸을 자해해서 선택된 갑작스러운 죽음은 유가족과 친구·이웃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타격과 함께 윤리적 부담을 남긴다. 그래서 잠시 멈추고 잘 애도해야 하는 것은 비탄에 빠진 유족과 친지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1초 1분이라도 멈출 것은 일상의 모든 것이고, 특히 비난·조롱·‘쇼’ 등인 듯하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와 거기 투사된 자아의 전반이 비난·조롱·‘쇼’로 이뤄져있기 때문이다.

‘재기해’ ‘태일해’ 같은 언어가 이 사회 다음 세대의 입에서 구호로 나오고, 그 나이 되도록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지도 애도하지도 못하는 가련한 엘리트들의 헛소리가 대기를 더럽히는 지금에도,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을 기록해온 ‘자살공화국’에서 자살의 행렬은 멈추지 않고 있다. 부족하나마 몇 년간 이어진 자살 예방 사업 덕분에 중년·노인 자살률이 조금 진정되고 있다지만, 10대와 20대의 자살률은 외려 증가하고 있다. 특히 중고생들 사이에서는 ‘자해 놀이’라는 것이 SNS를 매개로 유행을 타고 있다 한다. 여전히 경쟁과 등수가 교육을 지배하는 와중에 혐오와 자해의 문화가 겹치는 형국이다.

이제 안일한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교육과 공동체의 관점에서 혐오와 인터넷 문화에 대해 접근해야 하는 게 아닌가? 들끓는 이 나라에서 부족한 것은 ‘자유’나 ‘경쟁’이 아니라, 연민과 공동체의 윤리 아닌가?

다시금 스스로 생을 버린 많은 여린 이들과 노회찬 의원의 명복을 빈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자살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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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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