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말이 되어 대학은 여름방학을 맞았다. 지금 대부분의 대학교는 그간의 과제들을 평가하고 기말고사 채점을 마감하여 성적을 입력하는 기간이다. 봄학기 내가 강의한 학부 과목은 젠더연구 관련 과목이었다. 

내가 2006년부터 매년 담당해온 이 젠더연구 수업에서 40명 남짓한 수강생 대다수는 여학생이다. 남학생은 때로 2~3명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2000년대 말에서 201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는 학생들이 적었다. 이때는 ‘포스트 페미니즘’이나 ‘신보수주의’ 경향 속에서 여학생들도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으로 발언을 시작하곤 하던 때다. 

2015년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우리 문화 전반에서 다시 증가하였다. (문화평론가 손희정은 이 현상을 ‘페미니즘 리부트’라 명명했다.) 그런데 올해엔 학기 초부터 눈에 띄는 차이가 있었다. 넉넉히 50명으로 정해 두었던 정원을 훌쩍 넘기고 10여명이 추가로 수강신청을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아마도 2017년 가을 이래로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국내외의 미투 운동과 지난해 디지털 성폭력 및 불법촬영 반대운동 등이 성평등에 관한 관심을 부쩍 높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60명 이상이 빼곡히 앉은 강의실이 처음엔 낯설기까지 했다. 그중엔 남학생도 10여명 있었다. 이 학생들은 이 강의에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궁금했고, 소통이 잘될지 실은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강의실에서는 수줍어하는 학생들도 따로 마련해 준 인터넷 토론실에서 남녀 가릴 것 없이 하루에도 수십개씩 질문과 코멘트를 올리며 의견을 표현하고 생각을 교환했다. 수업에서는 페미니즘을 배경으로 여성을 공부하면서도 학기의 절반가량은 남성성을 연구하는 글들을 읽었고 성소수자 관련 의제들을 다루었다. 문학작품과 이론서를 아우르며 읽은 내용들이 어려웠지만, 학생들은 읽은 책들 못지않게 수준 높은 언어로 명료하고 논리적으로 생각을 표현했고 경험을 공유했다. 

남성성에 관한 논의는 조용했으나 뜨거웠다. 전통적, 제한적 남성성의 굴레인 이른바 ‘맨박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남학생들의 의견이 많았다. 남성들의 공고한 동성사회적 유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남성사회화의 관습이 그 굴레를 깨기 어렵게 만든다는 데 대한 예리한 비판이 학생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남녀 학생들 모두 우리 사회에서 남성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좀 더 유연해져야 하며 남성성에 대한 남성의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에 깊이 공감했다는 점에서 보람이 있었다. 남학생들이 반페미니즘적 입장이 아닌 차원에서 남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경험을 반추하고 남성으로서의 목표와 지향을 기꺼이 재고할 공적인 기회를 반겨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유의미하다. 

여자들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거나 그래서 남자들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생각은, 페미니즘이 이미 목적한 바를 이룩했다는 전제하에 있다. 모두가 살기 힘든 현실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그러한 현실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성차별 역시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성평등은 ‘이미 이룬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의 목표다. 남녀의 불균형한 권력구도는 역사상 뒤집힌 적이 없으며 여전히 남성중심적으로 기울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성평등은 한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늘 실천을 통해 유지해야만 하는 과정인 것이다. 법과 제도를 통해 특정 분야에서 형식적으로 명목상으로 성평등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히 유지되고 실행되도록 언제나 주의하고 평가해야 한다. 성평등을 위한 일상의 성찰적 실천이 언제나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누군가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평등한 사회에 대한 지향이 없는 사람이다. 여기에 남성들의 인식과 참여가 없다면 성평등한 세상은 비현실적 꿈일 뿐이다.

예비군 훈련의 인권, 법률 교육시간에 성매매 시 처벌받지 않는 방법, 모르는 여성에게 강간죄로 무고당하지 않는 방법 등을 강의했다는 해군장교 이야기나, 경찰간부 승진 예정자들과 공공기관 공무원들이 성평등 교육 자체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불성실함으로 자리를 이탈하고 불평을 했다는 등의 소식은 듣는 이조차 부끄럽게 만든다. 하지만 때 이른 절망 또한 일종의 무책임일 수 있다. 기성세대의 의식변화에 현실적 한계가 있을지라도 젊은이들의 삶은 더 나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깨어있는 남성들의 수를 늘리고, 그들이 침묵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여러 건의 카톡방 사건들을 비롯하여 버닝썬 사건, 정준영 사건 등은 그 사태에 심대한 문제의식을 느낀 ‘내부자’ 혹은 목격자 남성이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남성들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반성과 변화를 촉구했기 때문에 알려지게 되었다. 남성성 연구와 남성 교육에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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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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