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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주요 매체들은 휴대전화 포털 첫 페이지를 차지하기 위해 각개전투를 벌인다. 뉴스는 ‘콘텐츠’가 되었고, 포털이라는 ‘플랫폼’에 얹혀 배달된다. 우리나라에서 포털은 곧 언론 그 자체이다. 성인 70%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며, 언론사 홈페이지를 찾아가서 뉴스를 보는 사람은 5%에 불과하다.

포털은 유입 기사들을 여러 방식으로 경쟁시킨다. 열독률 높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연령별 인기뉴스 등 다양한 방법으로 순위를 매긴다. 자극적 단어를 품은 기사들이 포털 1면을 장식하고, ‘국민의 짐’ ‘대검 나이트’ ‘망신당한 모지리’ 등 개인 블로그에나 나올 성싶은 단어들이 버젓이 뉴스 헤드라인이 된다.

포털 안에서 모든 매체는 혼종성을 가지게 된다. 신문도 동영상을 품게 되고, 방송도 텍스트 지면을 가지게 된다. 라디오도 유튜브를 통해 보이는 라디오로 재탄생한다. 이런 가운데 주요 언론과 소셜미디어의 간극은 희미해진다. 이제 매체의 차이는 의미가 없게 되었고 ‘정론’의 지대도 더 이상 특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모두 5인치밖에 안 되는 손바닥 전화 화면 안에 노출되기 위해 개싸움이 벌어진다.

이런 가운데 정치적 쟁송 장면들이 집중적으로 오락화된다. 모든 매체들은 일제히 스포츠 중계하듯 정치권 싸움을 단어 하나 놓치지 않고 생생하게 중계한다. 게다가 이런 싸움을 해설하는 시사평론가 직군들이 자리 잡게 되고, 기자들은 그들 중 몇 사람을 ‘스타’로 만들어가면서 판을 키운다. 이들은 적당히 정치권 싸움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며 흥을 돋구며, 이런 흐름은 다시 공식 뉴스의 ‘기사’로 재탄생하는 기이한 뉴스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감정선을 건드리는, 내용 없는 기사들이 넘치고, 화풀이와 비난 일색의 댓글이 도배된다. 현 정부를 공격하는 보수 매체들의 기사들도 어이없지만, 이를 방어하려는 진보 매체들의 기사도 수준은 똑같다. 매체는 진영싸움을 넘어 막말과 비난을 1면에 노출하는 일을 끊임없이 자행하면서 분노하게 만든다.

댓글은 이런 주요 언론들의 플레이를 그대로 증폭한다. 정치권의 막말 대립이 언론을 통해 생중계되고, 그 결과는 시민들의 댓글을 통해 그대로 증폭되어 다시 정치권으로 피드백 된다. 언론은 이 과정을 필터링하기보다 오히려 클릭 수 확보에 활용한다.

이러는 사이에 국가정책에 대한 장기비전과 숙의적 토론은 사라져버린다. 논쟁은 결코 장기비전과 이상주의를 품어내지 못하고 단지 눈앞의 개싸움에만 집중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도대체 조국, 추미애, 윤석열, 이런 이름들이 우리가 온 신경을 쏟아 ‘팔로우잉’할 만큼 대단한 일들이었을까? 사람에게 집중된 기사가 아니라 그 뒤에 숨은 구조적 문제에 집중된 심층기사들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런 메커니즘은 그대로 시민들의 정치학습에 반영된다. 그렇게 설정된 매체소비 형태의 악순환적 되먹임체계는 민주주의, 인권, 평등, 배려 등의 가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왜곡한다. 시민들은 이 되먹임 과정에서 구조적 문제를 해체하려는 냉철함보다는 눈앞에 지목된 특정 개인을 비난하거나 옹호하면서 분노를 털어낸다. 구조가 아니라 사람에게 분노하는 흐름을 만들고, 시민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왜곡된 정치사회화를 학습한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정당정책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기보다 감정적 친밀성 혹은 소원함에 따라 투표하도록 만든다.

사정이 이렇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피동적 정치학습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능동적 대안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물론 정치 개혁과 언론 개혁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시민의 입장에서도 포털이 끌고 가는 지금과 같은 정치학습방식을 대체할 새로운 담론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해보인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성인들에게 정치교육은 낯선 단어이다. 하지만 이제 적극적으로 정치 문해교육과 미디어 문해교육이 청년층 및 중년·고령층 사이에서 번져 나가길 기대한다.

그 출발점으로 왜곡과 분노의 정치를 연성화할 수 있는 중간숙의집단을 형성하는 일도 도움이 된다. 중간숙의집단은 정치현장에 만연한 분노의 문화를 분석하고 해체하며, 그 모순을 상호 인정과 존중으로 간파하는 자발적 정치토론모임을 말한다. 또한 이를 양성하는 시민교육 프로그램들이 증가했으면 한다. 갑자기 툭 던져진 ‘테스형’ 혹은 ‘파우스트’의 꼬리만 물지 말고 함께 읽고 토론하자. 진영논리로 끌려다닐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끝없을 것 같던 악순환의 고리가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할지 모른다. 상대를 궁극적으로 궤멸해야 할 적으로 인식한다면 더 이상 민주주의는 없다. 대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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