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사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다. 이사간 곳이 하도 오래된 집이라 수리할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원래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이젠 구분조차 어려운 문짝에 직접 페인트칠을 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전화가 걸려왔다.

“고객님, 인터넷 이전설치 신청하셨죠?” 통신사 고객상담원이었다.

“네네, 제가 신청한 날짜에 설치가 가능한가요?” 반갑게 받았는데, 그는 곧 전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객님, 이사가신 곳이 저희 통신사와 제휴를 맺은 곳이더라고요. 이참에 다른 상품을 이용하시면 할인 혜택을 더 많이 받으실 수 있어요.” 

뭐라고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이전설치 담당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혜택을 받으려면 제휴카드를 새로 발급받으란 거잖아요. 전 이미 다른 제휴카드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시구나…. 그런데 그것보다 이게 혜택이 더 커요. 지금 계산을 해보면….”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태산인데, 끼어들 틈조차 전혀 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그에게 나의 인내심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귀찮은 기색을 감추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순도 100%의 짜증 섞인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

“저는 카드를 또 발급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전설치 담당자가 아니면 통화도 어렵고요. 끊겠습니다.”

통신사의 상술을 욕하며 다시 페인트칠을 이어갔지만, 이상하게 계속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감정이 여과 없이 담긴 내 말투에도 끝까지 하이톤의 발랄함을 유지한 채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던 그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그가 나에게 건 전화는 그날 몇번째 통화였을까.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기 전 몇번이나 심호흡을 했을까. 어떻게 하면 욕을 안 듣고 대화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점잖게 거절당할 수 있을지, 그는 전화를 걸기 전 얼마나 고민했을까.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으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만 선의를 보낸다”는 소설가 C S 루이스의 말처럼, 감정노동자에게 먼저 전화 끊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던 나는 정작 일상에서 마주치는 그들을 그동안 얼마큼 성실하게 대해왔던가. 물론 나는 여전히 카드를 더 만들 생각이 없기에 지금 다시 전화를 받더라도 결과는 같겠지만, 그래도 좀 더 따뜻하게 말할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얼마 전 한 포털사이트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힘든 하루를 보낸 퇴근길 지하철에서 옆 사람과 부딪쳐 연신 사과하자 “하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따뜻하게 돌아온 한마디에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졌다던 누군가의 글이었다. 사람들은 무심코 주고받은 따뜻한 말 한마디에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던 자신의 경험담을 댓글로 달기 시작했다.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저도 편의점 아르바이트할 때 봉투값 받는다는 이유로 얼굴에 동전을 던진 손님, 빨대 위치를 못 찾으시는 것 같아 가르쳐드렸더니 ‘신경 끄고 너나 잘하라’던 손님들 때문에 유난히 힘든 날이었어요. 그날이 마침 1월1일이었는데 한 손님이 저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힘내세요’라고 말하는데 순간 눈물이 나와서 손님도 저도 당황했던 기억이 있네요.”

“저도 피자집 아르바이트하면서 밥 먹다가 홀에 손님이 오셔서 바로 일어났는데, 미안하다고 천천히 만드시라고 할 때 이상하게 울컥….”

“전 몇년 전 일요일에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는데 이상하게 그날도 상담사분이 받으시더라고요. 전화를 끊기 전 상담사분이 좋은 하루 보내라고 하시길래 ‘상담사님도 주말인데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했죠. 그랬더니 갑자기 그 매뉴얼 말투가 아닌, 떨리는 목소리로 ‘고객님,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실례가 될까봐 위로나 다른 얘기는 못하고 ‘제가 더 감사해요’라고만 말하고 끊었는데 계속 마음이 좀 그렇더라고요.”

따뜻한 말 한마디만으로 누군가를 구원할 수는 없다. 콜센터 직원의 실적 압박은 여전할 것이고, 점심시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아르바이트 직원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의 지친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나 쉽다는 건 말을 건네는 쪽이나 듣는 쪽 모두에게 선물 같은 일이 아닐까.

며칠 전 새로 이사한 집에 조명을 설치했다. 설치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던 기사분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여러 집을 다녀봤는데, 고객님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시는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기분 좋게 해드린 기억이 없어서 “제가 뭘 해드렸는데요?”라고 되물었더니 돌아온 답. “조명을 켜니까 예쁘다고 해주셨잖아요.”

<정유진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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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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