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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팀 모두 실수가 없다면 그 경기는 무승부일 것이다’ 히딩크 감독의 명언이다. 이 말은 주석이 필요하다. ‘실수하면 용서치 않겠다, 낙오자는 버리고 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히딩크는, 감독도 선수도 심판도 실수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것을 줄여가기 위해 노력하고 격려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타박하지 않고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반면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실수하면 낙오자로 만들고 패잔병으로 만들어버린다. 대통령은 임기 내내 노기 띤 얼굴로 국민을 타박한다. 그리하여 이 도시의 일상이 움직이는 시한폭탄으로 가득차 있다. 실수하면 분노하는 세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이세돌 대 알파고의 대결. 이를 ‘기계 대 인간’의 대립보다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세돌은 스포츠의 위엄 있는 가치를 온몸으로, 바들바들 떨면서 증명했다. 모든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3번의 초읽기 기회를 모두 사용하고 겨우 남은 1초 안에 돌을 놓았다. 우리가 본 이세돌은 ‘기계에 맞선 의연한 인간’이자 동시에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나약한 인간의 간절한 몸부림이었다.

‘resign’, 즉 ‘물러나다’ ‘포기하다’란 뜻이다. 예상 승률 10% 이하로 떨어질 때 나타나는 단어다. 알파고는 180수 만에 이 단어를 ‘던지며’ 불계패를 인정했다. 단순하지만 의미 있는 장면이다. 그 표현 방식을 보자. 구글은 유머 감각이 풍부한 회사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는 디지털 최강자의 이미지로 항상 미래를 여는 ‘창’을 보여준다. 스티브 잡스의 유훈이 서려 있는 애플은 극단적 미니멀리즘으로 격렬한 팬심을 이끈다. 반면 다국적 글로벌 인재들의 혼합체인 구글은, 비록 모니터 뒤에는 엄청난 데이터베이스와 경악할 만한 기술을 숨겨놓고 있지만 그 일부가 사용자의 모니터에 나타날 때는 독특한 유머를 사용한다. ‘구글 플레이’, 즉 감각적인 즐거움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모티콘과 농담 섞인 설명, 심지어 약간 비틀린 블랙유머까지 볼 수 있다.

그런데 불계패를 인정하는 팝업창은 단순하다. 구글이 이 대결을 엄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과학철학자 문송천 교수는 철저하게 통제된 회사 내부가 아니라 그 밖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소프트웨어 성능 시험을 하는 것은 “인간 존엄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는데, 그 점을 구글 딥마인드도 어느 정도 숙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도에 따르면, 3연패로 숨막히는 긴장에 빠져 있던 지난 12일은 이세돌 선수의 결혼 10주년 기념일이었다고 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파티를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때 호텔 직원이 꽃과 샴페인과 축하 카드를 전달했다고 한다. 이세돌 부부의 결혼 10주년을 축하하는 데미스 허사비스 알파고 CEO의 선물이었다. 알파고의 대리인으로 이세돌과 마주앉은 구글의 아자황 연구원은 5시간 가까이 겸손한 자세를 견지한다. 아마도 허사비스는 ‘빅 브러더’는 아닌 듯하다.

알파고는 측량할 수 없는 연산 능력으로 이세돌을 학습했듯이 이세돌 또한 학습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해부했듯이 이세돌 또한 알파고를 해부했다. 알파고가 이세돌의 모든 기보를 습득해 해부한 반면 이세돌에게 제공된 정보는 판후이 2단과 치른 몇 장의 기보뿐이었다. 그래서 두면 둘수록 알파고가 강해지는 게 아니라 이세돌이 현묘해졌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 시대의 문명을 공부했다. ‘기계 대 인간’의 싸움에서 아직 인간의 멸종을 논할 단계는 아니라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 말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세돌의 모습에서 스포츠에 내재된 가치, 나아가 인류의 기억에 배어 있는 견실한 의미가 뜨겁게 확인됐다는 점이다. 이세돌은 긴장했고 주저했고 번민했다. 이런 면모는 기계인 알파고에게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인간이 더 ‘인간적’이라고 단정하지 말라. 나는 지금 알파고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상실된 그 무엇을 말하려는 중이다.

오늘의 사회는 번민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과연 ‘인간적’인가. 이세돌은 실수했고 좌절했고 괴로워했다. 기계에겐 그런 감정이 없다고, 그래서 인간은 아직 우월하다는 식의 서푼어치 감상을 주장하지 말라. 오늘의 사회는 감정을 포기하도록, 단일한 감정만을 갖도록, 인간을 의미 있는 ‘개인’으로 만드는 다양한 감정을 박스에 싸서 수신자를 알 수 없는 곳으로 택배로 부쳐버린다. 그곳에서 우리의 사생활은 완벽하게 해부당한다.

나는 지금 우리가 상실하고 있는 감정들을 말하는 중이다.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 외롭고 슬픈 감정, 나약하고 박약한 감정, 쓸쓸하여 비틀거리는 감정 말이다. 여느 종목과 달리 바둑 기사는 홀로 네댓 시간을 반상 앞에 앉아서 견딘다. 축구라면 하프타임이 있고 야구라면 더그아웃에서 수시로 대화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종목에서 동료가 있어 패스를 주고받을 수 있다. 부담을 나눠 지고 실수의 책임을 나눠 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둑은 그렇지 않다. 오로지 단독자로 앉아서 견딘다. 더욱이 알파고라니! 앞에 보이지도 않는 상대, 분명히 존재하지만 실체를 느낄 수 없는 거벽 뒤의 장대한 기계들에 맞서 이세돌은 고독을 견디고 외로움을 이기며 실수를 줄이고자 피 말리는 초읽기를 거듭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성원했다. 얼핏 보기에 ‘기계에 맞선 인간’을 성원하는 것이지만 그 집합 열정 안에는 오늘의 극단적 상황에 몰린 우리들을 향한 성원이다. 이세돌의 외로움은 우리 모두의 것이었고 그의 분투 또한 우리 모두의 박수였다. 이 사회가 버리라고 강요한 마지막 한 줌의 인간성!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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