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소 마운틴 랜디스는 미국 연방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던 1920년 프로야구연맹의 초대 총재로 취임했다. 프로야구계가 제시한 영입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종신직인 데다 총재 연봉이 판사 연봉의 다섯 배가 넘었다. 겸직으로 물의가 일자 법무부가 조사한 후 총재 일을 해도 판사로서의 직무 수행에 지장이 없다는 결론을 냈다. 하지만 미국변호사협회는 랜디스의 행위가 ‘온당치 못한 외관’을 보였다는 이유로 제재를 결의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실체가 어떻든 외관상 의심스러운 행위는 그 자체로 사법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다는 것이었다.

워런 법원은 진보적 판결을 많이 낸 것으로 유명하다. 민주당 출신 존슨 대통령이 재임 중일 때 연방대법원장을 임명할 기회를 주기 위해 진보 진영은 1968년에 꾀를 냈다. 얼 워런이 대법원장직을 사임하고 그를 이어 대법관 에이브 포터즈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하자는 것이었다. 문제가 터졌다. 포터즈가 아메리카 대학교에서 받고 있던 강의료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그는 상원의 인준을 받는 데 실패했다. 다음해에는 다시 포터즈가 어느 사업자에게 법률 조언을 해주고 2만달러의 사례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법무장관이 대법원장을 면담해 연방수사국의 조사 결과를 전달하자 이틀 후 포터즈는 사직했다. 대법관직마저도 놓친 것이다. 여기에도 문제는 포터즈의 행위가 실제로 위법하다는 것보다는 그런 외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 취임한 후 워런이 사임하자 대법원장에 임명된 사람은 보수 성향의 워런 버거였다. 포터즈 사건은 ‘연방 사법부의 진보주의에 대한 조종(弔鐘)’으로 평가된다.

포터즈의 후임으로 지명된 클레멘트 헤인즈워드 판사도 다시 상원의 인준을 받는 데 실패했다. 어느 공장에 관한 소송을 처리하면서, 그 공장에 자판기를 설치해 수익을 올리고 있던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고서도 사건에서 회피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헤인즈워드는 청문회에서 내내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실체만이 문제가 아니라 온당치 못한 외관마저도 피해야 한다는 것으로 시민들의 윤리적 기대치가 높아졌는데도, 그는 여기에 부응하지 못했다.

판사는 안정과 절제의 표상이다. 미국의 사이먼 리프킨드 판사는 이렇게 썼다. “별난 행동은 판사에게 금기사항이다. 폴로 경기장에서 폴로를 지나치게 잘 치거나, 경마장의 매표구에서 50달러짜리 마권을 사는 모습이 너무 자주 보여서는 안된다. 판사의 아내가 동네에서 제일 먼저 토플리스 수영복을 입은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 사생활이 이 정도이니, 돈벌이에 이르면 바짝 주의해야 한다. 판사의 경제활동이 직무와 관련이 있는 듯한 모습, 즉 온당치 못한 외관조차도 보일 수 없다. 이것을 ‘황후의 처세도(Caesar’s wife doctrine)’라고 한다. 황제는 높은 사람인 만큼 자신은 물론 그 아내도 의심스러워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디 판사뿐이랴. 모든 공직자가 그렇다. “당신들이 문제 삼은 그 투자와 내 직무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해서 나는 억울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편이 한 주식 투자라서, 아내가 건물을 샀기에, 어머니가 위장전입을 한 것이어서 나는 몰랐다고 해도, 양해를 받기 어렵다.

돈벌이만 그런 게 아니다. 판사실에 변호사가 드나들지 못하게 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아무리 사건 부탁을 하러 들어갔던 게 아니라고 해도, 사건이 해당 재판부에 걸려 있는 이상, 아무도 그 말의 진실성을 믿어 주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온당치 못한 일은 피한다는 ‘피지(避止) 원칙’은 법조윤리에서 상식이다. ‘이해충돌’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는 낱말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법관윤리강령에도 이 원칙이 반영되어 있다. 다만 오늘날 모든 공직 후보자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사회가 공직자에게 요구하는 윤리적 기대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공직자가 인식하는 윤리칙의 수준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게 아닌데 왜들 그렇게 날 억울하게 만드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인간적으로는 안되었지만, 공직의 염결성이 가지는 엄중함을 생각하면 그런 항변은 수긍하기 어렵다.

배밭은 배가 떨어지는 곳이다. 그러니 까마귀일랑 아예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왜 하필 그때 떨어졌느냐고 배를 나무라거나 내 날갯짓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과학적으로 설명해도 잘 믿어 주지 않는다. 친척이 목포에 무슨 점포를 샀다는 어느 국회의원이 곤욕을 치르면서 사실이 그게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의혹의 기초가 된 사실 자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단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기초사실이 외견상 해당 인물의 직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면, 그것이 바로 이해충돌 상황이다.

억울한지 여부가 문제가 아니다. 공직자의 경제활동이 직무와의 관계에서 실체가 어떻든 의심스러운 외관을 띠면 안된다는 것,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집권세력의 앞날은 순탄치 않다.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주식 투자가 문제되자 “이제 진보 진영은 도덕적 고지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한 어느 보수 성향 언론인의 주장을 가볍게 들어선 안된다. 워런 법원의 진보주의에 대한 조종은 온당치 못한 외관이 일으킨 도덕적 의혹으로 울렸음을 상기하라. 억울한가? 세상은 변했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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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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