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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을 맞아 올해의 국내 주요 사건을 돌아보며 열쇳말을 뽑아보니 온통 을씨년스러운 어휘들이다. 모든 열쇳말을 아우르는 한 단어는 ‘퇴행’일 것이다. 2014년의 하부구조에 1970·80년대의 상부구조가 이물스럽게 포개지는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는 잊고 살았던 악몽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심각하게 민주주의의 위기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① 공포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4월16일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해 수학여행 중이던 안산 단원고 학생 250명 등 탑승객 304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세월호 ‘사고’를 ‘사건’으로 만든 것은 구조 과정에서 보여준 국가의 무능과 부재였다. 수백명의 승객을 태운 채 배가 침몰하는 모습이 TV에 생중계됐다.

사람들은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물었다. 시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과 부재야말로 재앙 그 자체였다. 누구나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공포보다, 사고를 당해도 국가로부터 구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가 사람들을 짓눌렀다.

② 분열

세월호는 초기만 해도 사회통합적 이슈로 보였다. 사망 또는 실종된 단원고 학생들의 사연을 접하며 모든 시민이 울었다. 그러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 현 정부의 정치적 유불리에 직결된 문제가 쟁점이 되자 양상이 바뀌었다. 극우단체는 유가족을 공격했고, 정부와 여당은 이를 조장하고 즐겼다.

정부가 ‘분열’과 ‘갈라치기’를 국정운영의 동력으로 삼은 사례는 이 밖에도 여럿이다. 정규직의 과보호가 비정규직 문제의 원인이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을 조장했다. 공무원연금 문제를 놓고는 ‘국민’과 공무원의 대립구도를 만들었다.

③ 조작

한국 사회에서 증거를 조작해 간첩을 만드는 일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그러나 탈북 화교 유우성씨 간첩조작 사건은 이런 인식이 얼마나 안이한가 보여주었다. 국정원 직원들이 유씨를 간첩으로 옭아매기 위해 중국 공문서인 유씨의 북·중 출입경기록을 위조해 법정에 냈고, 그것이 위조라는 게 탄로날까봐 제2, 제3의 위조문서를 만들어 법정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지만 수사는 국정원 ‘윗선’까지 확대되지 않았고, 위조문서를 법정에 증거로 제출한 공안검사들은 기소되지 않았다.

④ 불통

현 정부의 ‘불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인사 문제인데, 그중에서도 지난 6월 개각 때의 인사 참사가 특히 대표적이다. 안대희 전 대법관을 총리 후보자로 발표했으나 변호사 개업 뒤 과도한 수임료가 문제가 돼 스스로 물러났고, 극우 논객인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을 대타로 내세웠으나 각종 강연에서 한 ‘친일’ 발언 등이 문제가 돼 낙마했다.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도 제자의 논문을 여러 차례 표절한 사실이 드러나 낙마했다.

정치권에서는 인사 참사의 배경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인 ‘비선라인’이 인사를 주무르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오곤 했는데, 올해 1월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해 지난 11월 말 언론에 보도된 이른바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은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박근혜 대통령이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미래 과학인재와의 대화’ 행사장에 서울과학고 신하늘양(왼쪽), 서울대 박범수씨(오른쪽) 등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공포, 분열, 조작, 불통은 민주적 가치는 물론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도 반한다. 그것들은 차라리 유신시절의 음산한 풍경과 공명한다. 박 대통령의 공약집에는 국민통합, 경제민주화, 창조경제 같은 추상적이고 다의적인, 근사하고 휘황한 말들로 차고 넘치는데, 그 공약의 ‘내심’이 무엇이길래 현실은 이리 살풍경한지 궁금하다.


정제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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