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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팬데믹은 지구의 일상이 되었다. 인간의 환경 파괴가 지질층까지 변화시켜, 충적세(沖積世)에 이어 ‘인류세(人類世)’가 도래했다. “아프다”는 뜻의 ‘이타이이타이병(いたいいたい病)’은 1910년경부터 보고되었다. 일본 도야마현에서 발견된 대량의 카드뮴이 인간의 뼈에 축적되어 사망에까지 이르는 병이다. 100년도 더 된 사건이다. 당시 일본, 아니 인류는 무엇을 배웠는가. 이제는 지구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중이다.

이대로라면 지구의 지속 가능성은 없다. 방식은 다르지만 누구나 변화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자본은 주력 업종을 바꾸고, 나 같은 서민들은 그저 막막하고, 경제학자들은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를 제안한다. 인류의 가치관에 근본적 변화가 없다면, 지금처럼 불평등한 고통(“수업은 온라인이 되지만, 급식은 안 되잖아요”)보다 차라리 이별의 시간차가 없는 지구 동시 멸망이 나을지 모른다.

문명의 전환을 논하는 이때 ‘여성적 가치’에 주목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 상황이 근대 이후 서구 남성 주도 발전주의의 산물이라면, 이 과정에서 희생되어 왔던 다른 지구 구성원들에게 시선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의미 있는 영화들에서 마지막 생존자는 힘센 사람이 아니라 여성, 동물, 아이들이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대표적이고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도 임산부와 아이만 살아남는다. 이들은 피보호자가 아니라 ‘악당’에게 문제제기하는 대안적 주체들이다. 이러한 재현은 이들 존재의 역사적 상징성 때문이지, 당장 북극곰이 지구를 살린다는 얘기는 아니다.

여성적 가치도 마찬가지다. 에코 페미니즘은 매우 다양해서 내부 논쟁도 치열하고 일반의 오해도 많다. 대개 남성은 관심이 없고 여성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지구를 살리라고 요구하지 말라”고 외친다. 에코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의식은 자본주의와 군사주의의 폐해다. 내가 아는 에코 페미니즘은 “민주주의는 타자 없는 사회”라고 외친 마르크스의 입장에 충실하다. 자본이 주도하는 환경 파괴는 자연을 대상, 도구로 삼는 발상에서 나왔다. 나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보다 에코 페미니즘이 마르크스주의와 더 친연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팬데믹 속 문명 전환을 앞둔 지금
돌봄 노동을 ‘여성적 가치’로 규정
“대안이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

사회 재생산에 필수적 돌봄 노동은
미래 대안적 가치가 되는 것이지
여성이 했다고 여성적 가치는 아냐

성역할 찬양은 무지·속임수일 뿐
보살핌 노동에 대한 재평가 해야

인류 문명이 여성의 노동에 빚지고 있으면서도 여성을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하면서 시작했기 때문에, 여성주의는 매사에 근본적인 이슈가 된다. 유사 이래 여성은 항상 타자(他者, ‘사람 외 나머지 것들’)였다. 그 누적의 역사 때문인지 문명의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은 그간 가시화되지 않았던 ‘여성 문화’, 일상, 노동에 주목한다. 대표적으로, 여성이 전담해 왔던 돌봄, 보살핌 노동이 여성적 가치라며, “대안이 있다!”고 외친다.

그러나 누가 보살핌 노동을 하든, 그 내용이 대안적 가치가 되는 것이지 사람과는 무관하다. 예를 들어, ‘섬세함’은 여성적 가치도 남성적 가치도 아니라 개인에 따른 특성이다. 보살핌 윤리학을 제창한 캐럴 길리건이나 사라 러딕 같은 사상가들은 돌봄 윤리는 가부장제 사회의 ‘다른 목소리’일 뿐, “젠더 이슈가 아니다”라고 강조했지만 여성주의자 사이에서도 오해가 많다.

여성들이 주로 맡아왔던 살림살이, 즉 우리의 일상과 생명을 가능케 하는 식사 준비, 출산과 육아, 간병, 타인에 대한 배려, 감정 노동은 무임금이거나 비하되어 온 노동이다. 여성은 평생 이런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집에 가서 애나 봐라” “아줌마가 왜 사회에 나와서…” 같은 비난을 받아왔다. 이제 여성들은 이러한 이중 메시지에 넌덜머리가 났고, 젊은 여성들은 참지 않는다. 거듭 강조하건대, 팬데믹의 대안은 돌봄 노동의 재평가이지 여성적 가치가 아니다. 둘은 무관하다. 여성적 가치? 그런 것은 없다. 지구를 살리려면 남성을 포함한 보살핌 노동 종사자들의 처우 개선과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뿐이지, 여성의 성역할 노동 찬양은 무지이거나 속임수다.

며칠 전 모 남성 환경운동가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이제 남성성 대신 여성성의 시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남성성이 여성성으로 대체될 수 있을 만큼 ‘약한’ 가치라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니겠죠. 남성성과 여성성이 대칭적이라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봅니다. 만일 여성성의 시대가 되려면, 돈과 제도, 권력이 모두 여성에게 이양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남성성과 여성성이 대립항이라면, 여성이 왜 ‘제2의 성’이겠는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여성성과 남성성은 대립한(vs) 적이 없다. 흑인과 백인이 대립하는 집단인가? 장애와 비장애가 대칭적인 개념인가? 동성애와 이성애가 대립하는가. 그렇다면, 세상은 유토피아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조화도 양립도 균형도 불가능하다. 성별 제도(젠더)는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일 뿐이다.

‘남성’과 ‘여성’ 집단 모두 내부는 동질적이지 않다. 남성성은 특정한 시대와 지역마다 다른 사회 규범을 갖는다. 용기나 폭력처럼 남성성으로 간주되는 본성은 없다. 남성성(manhood) 연구로 유명한 웬디 브라운은 최근 번역 출간된 <남성됨과 정치 - 서구 정치 이론에 대한 페미니즘적 독해>에서 남성과 남성성의 필연적 연관관계는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만일 여성적 가치가 있다면 어떤 여성의 가치일까. 중산층 여성? 레즈비언 여성? 장애 여성? ‘여성’은 동일시(視)의 정치학이지 동일한 집단이 아니다. 여성적 가치는 여성 개념을 오해한 결과다.

여성주의의 주장은 돌봄 노동의 가치와 성격이, 경쟁과 능력 위주의 기존 공적 영역의 규범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쟁과 능력주의만이 인간의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공적 영역의 규범은 얼마나 살벌하고 일방적인가. 여성주의는 협상과 협력의 문화다. 남성 중심 사회에 ‘저항’하기보다는, 돌봄의 가치를 숙고하고 ‘포함’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여성의 성역할은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사회·국가를 위한 노동이었다. 그러므로 여성적 가치보다는 여성이 주로 해 왔던 노동의 성격을 재해석하자는 주장이 바람직하다. 돌봄 노동은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노동을 여성이 주로 해 왔다고 해서 여성적 가치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종사해온 안마 노동을 ‘장애적 가치’라고 하지 않는다. 시각장애인에게는 더 많은, 더 다른 직업 선택의 기회와 조건이 필요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노예로 끌려와 농장과 부엌에서 일하며 학대당한 역사를 ‘노예적 가치’라고 하지 않는다. 일의 성격에 대한 재인식이 중요한 것이지, 이제까지 특정 집단에게 강제해 온 노동을 특정한 인간의 가치(‘여성적 가치’)라고 명명하는 것은 폭력이다.

진보와 보수의 공통된 남성성이 있다면 개념을 규정하려는 욕망이다. 그들은 타인의 노동, 그것도 강제된 노동, 하면 할수록 저평가되는 노동에 자신의 필요에 따라 가치 여부를 정한다. 남성 권력의 가장 큰 특징은 공부하지 않는데도 무한정 발언권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지구를 낫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생태주의자 남성이 발전주의자 남성과 투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일론 머스크를 설득할 사람도 없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겠다는 일본 정부에 윤봉길 의사처럼 폭탄을 던질 수도 없다.

가장 빠른 방법은 보살핌 노동에서 면제된 남성들, 그래서 그 노동이 어떤 노동인지 모르는 남성들이 강제로 한 달만이라도, 여성들처럼 직장 생활을 병행하면서 육아와 식사 준비, 청소, 가정사 챙기기, 건강 약자 돌봄을 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국회의원 등 선출직은 ‘학교 급식실’ 같은 공간에서 특정 시간 일하지 않으면 피선거권을 제한해야 한다. 그렇다면, 좀 더 창의적인 대안이 나오지 않을까.

현재 20대 남성과 여성의 ‘갈등’은 젠더 문제도 세대 문제도 아닌, 기술 자본주의로 인한 실업 문제 때문이다. 첨단 기술은 기후위기와 빈부의 양극화를 가져왔다. 결국 부모의 계급이 자녀의 계급이 되고, 인생을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를 남성에 대한 보상, 남녀 모두 징병제, 모병제 등 군사(軍事)와 연결하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이다. 20대 남녀에게 돌봄 노동의 윤리를 ‘국민교육’의 일부로 도입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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