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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여성가족부는 덴마크 작가 페르 홀름 크누센이 쓴 그림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를 ‘나다움 어린이 책’으로 선정했다. 삽화의 구체성 때문인지, “시기상조” “포르노 같다” “자연스럽다” “어린이 성교육 어떻게 해야 하나” “동성애 조장” “조기 성애화 걱정” 등 논란이 일었다. 이에 여가부는 일부 초등학교에 보급한 책을 회수했다. 한편 대한출판문화협회는 “블랙리스트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며 우려를 표했다. 성을 둘러싼 이해(利害)와 이해(理解)의 복잡한 단면들이다.

비슷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 관련 도서 출간이 늘어났고 10대와 초등생을 대상으로 한 도서도 많이 기획되고 있다. 나는 한 권의 책에 참여했지만, 이후에는 모두 사양했다. 10대를 위한 책은 ‘10대를 위한 자본론’ ‘10대를 위한 한국문학 개요’처럼, 원래 분야의 쉬운 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식론으로서 여성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아동용, 10대용, 성인용이 난이도가 아니라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이론적 접근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여성주의는 성별·나이·인종·계급·장애·지역 등 여성들 간의 차이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50대 여성의 젠더 이해와 10대 여성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백인 여성의 페미니즘과 흑인 여성의 페미니즘은 다를 뿐 아니라 갈등 관계다. 50대에겐 젠더보다 건강이 더 큰 관심일 수 있고, 10대에겐 진로가 더 고민일 수 있다.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 양상의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이 페미니즘 이론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그래서 나는 10대를 위한 여성주의 책은 10대의 젠더 권력관계를 잘 아는 이가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 활동(sexuality) 개념, 성적인 것의 의미도 개인마다 인식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남성)의 노출 의상을 젠더 이슈로 보는 사람도 있고, 드레스 코드 차원에서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 인식과 구조적 조건의 간극 때문에 젠더 관련법은 포괄적인 동시에 실효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 결국, 법적 제재는 법 자체보다 사회적 인식에 크게 좌우된다.

한편 개인마다 성의 의미는 다르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선 남성 중심, 남성 성기 문화가 지배적이다. 한국사회의 성문화는 규범적으론 출산에 국한하고, 실제론 ‘n번방’ 같은 성폭력, 성산업이 주도한다. 이처럼 섹슈얼리티의 의미는 구조적으론 성별에 따라, 일상적으론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부나 공동체 차원에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용 매뉴얼을 만들기 어렵다. 여가부의 어려움이 여기 있다.

1970년대 미국에서 포르노방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성차별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건 매우 어려우며 실질적 효과도 없다고 주장했다. 나 역시 법 제정 운동에 열성적이었지만, 법적 해결의 한계를 잘 안다. 일상의 인식을 바꾸지 않는 법적 제재는 돈 많은 가해자가 받는 법률 서비스 수준만 높일 뿐이다.

성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출산 과정에 국한할 필요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섹스의 전제는 출산이 아니라 피임이다. 계획에 따른 출산은 피임에서 시작돼야 한다. 지금은 순서가 반대다. 한국사회는 포르노 산업의 영향이 절대적이어서, 남성 성기 중심의 삽입 섹스에 집착한다. 이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성교는 성 활동의 극히 일부이다. 성은 다층적인 차원의 사회성을 갖는다. 인간은 재생산(출산), 자아실현, 쾌락, 정체성, 건강, 친밀감 형성, 치유 등 다양한 이유로 성 활동을 한다. 내 주변에는 무성애자(無性愛者, asexuals)도 상당히 있다.

성교육은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가’가 아니라 인권과 공중보건 교육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타인 몸의 개별성을 인식하고 거리를 둘 줄 알며, 자기 몸에 대한 존중감을 키워주는 게 성교육이다. 이런 훈련은 장애인이나 외국인에 대한 무례나 폭력적 행동도 줄일 수 있다. 20대에게 성문화를 강의하다보면 무지와 왕성한 활동이 빚어낸 비극을 본다. 고통은 거의 여성의 몫이다. 초등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나는 건강교육(성교육), 정치교육, 환경교육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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