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새는 타조지만 날지 않는다. 나는 새 중 가장 큰 새로는 앨버트로스, 펠리컨, 콘도르가 앞뒤를 다툰다. 가장 작은 새는 단연 벌새다. 그중에서도 작은 종은 5㎝를 겨우 넘는데, 날갯짓이 몹시 빨라 1초에 80회에 이르기도 한다. 영어로는 허밍버드(hummingbird)라고 하는데, 작고 빠른 날갯짓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영화 <벌새>가 사랑받는다는 말을 듣고 극장을 찾았다. 감동 속에 영화관을 나설 때, 막상 벌새에 관한 에피소드나 장면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린 주인공 은희가 살아가는 모습이 작은 벌새와 같지 않으냐는 주변의 풀이를 들으니, 굳이 실제의 벌새가 등장하지 않은 것이 더 낫다고 수긍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자라는 아이가 자신과 주변 사람 그리고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커다란 도약이다. 어른에게는 선명한 것이 아이에게는 뿌옇다. 초점을 맞추는 일은 외롭고 고통스럽다. 어떤 아이는 그럭저럭 해내지만, 어떤 아이는 끝내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존중받고 싶지만 자신이 초라할 때, 내 가족이지만 나사가 빠져 있을 때, 친구지만 내 마음 같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때 아이가 ‘나는 어떤 존재인지’ ‘옆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자존감 잃지 않고 올바로 해독하는 것은 우주비행사가 달에 가는 것만큼 어렵다. 많은 어른들은 그 어려움을 이미 잊었지만 과장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우리 모두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많은 이가 그 통과의례를 마치지 못해 마음 한편의 짐으로 쌓아두고 있다.

영화 <벌새>는 성수대교가 거짓말처럼 무너졌던 1994년을 통과한 한 소녀의 삶을 복원한다. 은희가 맞닥뜨린 상황은 영화에 으레 등장하는 엄청난 사건이 아니다. 대결의 대상이 지구로 다가오는 소행성도 아니고, 지진도 아니며, 연쇄살인범도 아니다. 그래도 어린 은희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세상에 내보일 두드러진 자질이 없는 자신, 풍비박산은 아니나 가부장적이고 삐걱거리는 가정,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친구들, 그리고 막연히 감지되는 부조리한 세상이 그의 우주를 구성한다. 

그 속에서 은희는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까. 감독은 절제력을 잃지 않고 섬세하게 그 과정을 묘사하며, 스산한 시대의 단면과 공기마저 드러낸다. 게다가 ‘소년’이 아니라 소수자인 ‘소녀’의 성장기는 우리가 자주 본 ‘소년’의 서사와 결이 달랐고, 사람들이 게으르게 덧씌운 상투성을 벗어난 인물들은 관객의 자연스러운 몰입을 이끌었다. 

은희를 둘러싼 크고 작은 세계가 유기적이면서도 겹겹이 쌓여 있다는 점은 내 마음을 건드렸다. 지구는 자전하고, 자전하는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며, 행성들과 태양이 이루는 태양계는 은하계의 중심을 회전하고 있다. 은희는 가족에게서 불평등과 폭력과 서툰 애정을 겪는다. 그 와중에 친구들에게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낯설고 부당한 취급을 받는데, 뜻밖에 한문학원의 선생님에게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로 대표되는 부실한 사회는 또 다른 위기를 불러들인다. 영화는 주인공의 마음으로부터 가족과 친구와 학교와 지역사회와 대한민국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점차 확대되는 세계가 어떻게 은희의 성장을 더러는 촉진하고 더러는 위협하는지 보여준다. 은희는 자주 힘겹게 가끔은 경쾌하게 이에 대항하면서 자기를 담금질한다.

주인공 은희만이 아니라 그 친구들도 또 다른 벌새였을 것이다. 은희가 숨 쉴 수 있게 해준 학원 선생님 또한 은희보다 조금 큰 어떤 새로서 가혹한 자기만의 시간을 묵묵히 통과하고 있었으리라. 아니, 영화의 배경이 된 1994년에 수많은 은희들이 있었고, 오늘 이 순간에도 무수한 벌새들이 모순투성이 가족과 학교와 세상 속에서 작지만 장엄한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경제적으로, 인간적으로, 문화적으로 넉넉한 부모를 만나면 상대적으로 쉽게 헤쳐 나가겠지만, 참전을 면제받는 경우는 없다. 특히 그가 ‘소년’이 아니라 ‘소녀’인 경우에는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인지할 틈도 없이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세계가 자주 그들의 자아를 침입하며 괴로움을 겪게 할 것이다. 영화는 세대와 성차를 뛰어넘어 내게 그 점을 새삼스레 환기시켰다. 사람을 켜켜이 둘러싼 사회적 환경들은 그 거리가 가정보다 멀다고 영향력이 감소되지 않는다. 무너진 성수대교가 은희의 삶을 겨누듯이 온갖 방향에서 다가오는 사회의 중력은 개인을 마음껏 끌어당기고 뒤흔든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나는 이 시대 어린이와 젊은이가 겪는 세상에 대해 내 자신이 아는 게 거의 없음을 절감한다. 그들의 자아정체성은 어떤 시련 속에서 주조되고 있을까. 완전히 도착한 미디어 시대는 정체성을 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내가 자랄 때는 상상할 수 없던 전 지구적 네트워크는 통과의례를 어떻게 변형시켰을까. 한 개인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인형처럼 겹겹이 쌓인 현실에서 한 인간이 통합된 개인으로 바로 서는 것이 만만치 않은 시대다. 

자아정체성을 찾고 세상 속에서 의미를 만들다 마침내 자아를 벗어나는 게 사람의 행로라고 생각한다. 그 길은 원래 순탄할 수 없다. 은희는 가까스로 첫발을 뗐지만, 혹시 이 시대 어떤 벌새들에게는 애초에 거의 불가능한 여정이 아닐까. 주어진 자원의 차이가 너무 크고, 극단적으로 경쟁적인 세상에 던져진 어떤 은희들은 1초에 80번이 아닌 단 몇 번의 날갯짓도 힘들지 않을까. 벌새들은 작지만 수천㎞까지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은희가 대륙을 가로지르고 바다를 건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세대는 자기 아이에게는 온갖 날개를 달아주면서, 정작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누구 말마따나 걱정해주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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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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