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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의 중편 ‘장마’는 여름철 장마가 배경이다. 소설은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비가 며칠이고 계속 내렸다’로 시작해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장맛비는 ‘세상을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셔놓는다. 홍수에 돼지와 황소가 떠내려간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장마가 주제는 아니다. 소설은 장마 기간 한 가족에서 일어난 갈등과 화해를 그렸다. 6·25 전쟁통에 전쟁 부역자와 국군을 자식으로 둔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아들의 죽음을 두고 서로를 의심하며 불화하다가 장마가 그칠 무렵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작품에서 장마는 분단과 전쟁의 비극, 이데올로기 갈등의 은유로 읽힌다.

올여름은 ‘장마의 시간’이었다. 지루한 장마가 소설보다 더 생생하고 드라마틱하게 이어졌다. 장마전선이 한반도를 오르내리면서 산사태가 나고 둑이 터지고 도시가 침수됐다. 수천마리의 소들이 홍수로 떠내려갔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아닌 ‘지붕 위의 소’는 2020년 장마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기상관측 이래 가장 긴 장마였다. 54일간 지속된 장마는 평년보다 두 배나 길었다. 강우 패턴도 여느 때와 달랐다. 지속 강우가 아닌 특정 지역에 내리꽂는 물폭탄이었다. 기후변화가 원인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올 장마가 주목받은 것은 ‘역대 최장’이어서가 아니라 ‘기후재난’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기후위기는 ‘나의 일’이 아니었다. 알프스 빙산이 녹아내리고 ‘지구에서 가장 추운 마을’인 러시아 베르호얀스크의 수은주가 38도까지 치솟아도 그 지역 사정이려니 생각했다. 과학자들이 지구온난화 보고서를 잇따라 내놓아도, 현대문명의 붕괴를 경고해도 “내 사후에나 일어날 일”이라며 무덤덤했다. 그동안 한국인은 갈릴레이 등이 지동설을 얘기했을 때 천동설을 고집했던 중세인과 별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장마가 기후변화에 눈을 뜨게 했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믿고 싶어하는 ‘확증 편향’이 서서히 무너졌다. SNS에는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라는 해시태그(#)가 퍼져나갔다.

올여름 장마는 재난의 예고편에 불과하다. ‘기후재난’이라는 판도라 상자에서 얼마나 더 많은 재앙이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그간 기후변화에 둔감했던 것은 우리 곁에 판도라 상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코로나 시대의 ‘뉴노멀’로는 부족하다. 근본과 기준을 바꾸는 대전환이어야 한다. 자연을 정복하는 방식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순환적 삶’을 모색해야 한다. 얼마 전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의 말을 빌린다면,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기후위기는 자연을 정복해온 기술문명에 대한 경고다. 이번 집중호우 때 섬진강 일대의 홍수 조절용 댐과 제방이 역할을 하지 못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국내에 건설된 댐, 저수지, 보는 이미 넘쳐난다. 생활용수, 농업용수, 공업용수의 공급 능력은 세계적 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첨단 수리시스템은 물폭탄에 속수무책이었다. 예측이 불가능한 기후재난 앞에 물을 관리하는 인공구조물은 소용없었다. 4대강사업이 홍수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결론이 났다. 기후변화 시대의 물 관리는 강의 자연성을 회복하고 하천의 생태계를 키워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옛날 치수의 공적을 인정받아 왕위에 오른 우 임금의 물 관리 철학은 ‘물의 본성을 따르는 것’(順水之性)이었다.

소설 ‘장마’에서 반목하던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화해는 자연과 인간의 ‘순환적 삶’에 시사점을 준다. 할머니는 부역자로 끌려간 아들이 ‘아무 날 아무 시’에 올 것이라는 점괘를 받고 그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그러나 죽은 자가 돌아올 리는 없다. ‘아무 시’에 아들 대신 나타난 것은 큰 구렁이였다. 이를 본 사람들이 구렁이를 때려죽이려 할 때 외할머니가 나서서 주술로써 구렁이를 달래 집 밖으로 내보낸다. “집안일일랑 아모 염려 말고 어서 자네 가야 헐 디로 가소.” 구렁이를 사돈댁 죽은 아들의 현신으로 간주하는 외할머니의 생각은 비합리적이고 기괴스럽기조차 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외할머니가 아들을 저승으로 인도했다고 믿으며 감사 인사와 함께 화해를 청한다. 민간에 내려온 애니미즘이나 샤머니즘을 미신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생태문명은 동식물을 인간과 동등한 생명체로 존중하며 자연과 공생하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소설 ‘장마’는 기후변화 시대의 생태소설로도 읽을 수 있겠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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