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20일 미국.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상영 중인 오로라 극장에 여러 발의 총성이 울린다. “내가 조커다”라고 외친 청년 제임스 홈스는 이날 8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체포됐다.

요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커>를 본 뒤, 나는 내내 이 사건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의 주인공 아서 펠릭과 제임스 홈스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인 홈스가 조커와 동일시하면서 영화를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면, 허구적 인물인 아서는 홈스와 같은 실존 인물들에 이입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로 현실을 영화로 옮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조커'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아서가 참조하고 있는 사람들을 미국에선 ‘인셀(incel, 비자발적 순결주의자)’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20~30대, 애인 없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인 인셀은 강력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당연하게도 아서의 이야기와 인셀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공명한다. 특히 아서가 조커로 거듭나는 전환의 장면은 꽤 노골적이다. 

막 일자리에서 해고된 아서는 지하철에 앉아 있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양복쟁이 세 명이 지하철에 탄다. 그들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여자를 괴롭히자 여자는 아서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낸다. 아서는 나설 생각이 전혀 없지만 곤란하면 발작적으로 터지는 웃음 탓에 집단 구타를 당하게 된다. 여자는 이미 도망치고 난 뒤다.

아서는 결국 총을 난사하고 스스로를 구원한다. 그리고 스토킹하던 옆집 여자와 섹스를 나눈다. 조커의 탄생이다. 하지만 이 섹스는 완전히 붕괴된 아서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환상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아서의 괴물 (혹은 영웅으로의) 변신을 묘사하는 시퀀스의 시작과 끝에 여자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 현실의 여자는 아서에게 위험을 떠넘긴 채 자리를 떠났지만, 망상 속의 여자는 영웅이 된 조커에게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준다.

한편 조커를 낳은 것은 ‘토머스 웨인’이 상징하는 부패한 사회의 금융자본이다. 전혀 새롭지 않다. 다만 영화가 웨인을 설명하는 방식만은 흥미롭다. 그는 거대한 저택에 집사를 거느리고 살면서도 산업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인 <모던 타임즈>를 보며 여가를 보내는 진보적 문화 엘리트다. 정치 신성 트럼프가 2016년 대선에서 “인민의 적”으로 지목했던 바로 그 자들. 그들은 사회주의자의 코미디를 보면서 문화적 취향을 뽐낼 시간은 있지만,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울부짖는 청년의 고통에 귀 기울일 여유는 없다.

소수자와 다양성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와 선을 그으며 등장한 크리스토퍼 놀런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는 “윤리적 자본과 건강한 국가 시스템”에 대해 강조하면서 ‘건강한 보수’의 가치를 세련되게 설파했다. 그러나 인셀은 총기 난사로 그에 응답했다. 그렇게 트럼프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2019년, DC 유니버스의 외곽에서 등장한 <조커>는 인셀의 손을 들어준다.

물론 아서는 한심한 관종일 뿐이고, “내가 광대다”를 외치는 마스크맨들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폭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야말로 인셀의 은밀한 옹호자들의 자기인식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선량하고 억울한 피해자라고 주장할 뿐 영웅이라고 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들과 함께 선다. 관객들이 공감하지 않을 아서의 범죄는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B호실 여자는 어떻게 됐을까?) 코미디로 산화시켜버리고(발자국에 묻어나는 피는 상담사의 것이었겠지?), 아서의 흑화를 적극적으로 이해해 주면서 말이다.

현실과 영화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건 여기에서다. 아서와 인셀, 그리고 인셀의 옹호자들이 같은 변명 혹은 망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은 모방범죄가 아니다. 이미 편재하는 폭력의 반복과 지속이다.

어쩌면 이것이 마블과 경쟁하는 DC의 전략인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올바름을 ‘마블=기득권 엘리트의 것’으로 밀어내면서, 마블의 행보에 동의하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광대들의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것. 이 치밀하게 계산된 정교한 영화 앞에서 생각이 복잡해진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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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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