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으로 시작하는 글을 아이들은 자주 쓴다. 일단은 자신이 주어인 문장으로 글쓰기를 배워나간다. 재작년에 열다섯 살이었던 김서현이라는 아이는 원고지에 이렇게 적어서 들고 왔다.

‘나는 모든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다. 또 나는 친구와 먼 산으로 가는 수다를 떠는 걸 좋아한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고 사이가 더 돈독해지는 느낌이 든다.’

고작 세 문장이지만 나는 이 글의 화자가 조금 좋아지고 말았다. 누군가와 한참을 말하고 듣다가 해 지는 줄도 몰라봤던 사람만이 ‘먼 산으로 가는 수다’ 같은 표현을 쓸 수 있다. 만약 친구가 된다면 그로부터 경쾌한 여유를 나눠 받을 게 분명했다. 위의 글은 또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내 영원한 베스트 프렌드 김찬영이고 가장 싫어하는 사람도 김찬영이다. 김찬영은 나랑 세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인데 게임과 노래를 좋아한다. 찬영이 가수가 되면 좋겠다.’ 

‘나’였던 주어가 남으로 슬쩍 넘어갔다. 그 대상은 애증의 남동생이다. 가장 싫어하는 남이자 영원한 베스트 프렌드라니. 이 간극에서 관계의 탄력을 본다. 언제까지나 너와 가까운 친구일 거라는, 흔들리지 않는 전제 위의 다툼은 금세 회복되기 마련이다. 한껏 팽팽하게 늘어났다가도 빠르게 돌아오는 고무줄 같은 탄력이 남매 사이에 있는 듯하다. 김서현은 세 살 어린 남동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간단히 적은 뒤 가벼운 소망을 덧붙인다. 화자에 비해 동생이라는 인물은 아직 구체적이지 않다. 이름과 피상적인 정보만으로는 원고지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나기 어렵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며 몇 개의 계절을 통과하다보면 아이들은 어느새 다른 인물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숨을 불어넣는 방식 중 하나는 큰따옴표다. 아이들이 주어를 남으로 설정한 뒤 큰따옴표를 쓰는 순간을 나는 눈여겨보게 된다. 그건 다른 사람의 말을 거의 외워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했던 말만 기억해가지고는 큰따옴표를 잘 사용하기 어렵다. 같은 해에 김서현은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제목은 ‘이사’다.

‘다음주면 이사를 간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신이 났다. 하지만 엄마는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안방에 있는 침대를 들고 갈까, 두고 갈까? 들고 가기엔 이사 갈 집 안방이 너무 작은데. 이 침대가 푹신해서 좋긴 좋지만 두고 가야겠다. 애들 침대만 가져가야겠어.” 그다음에 엄마는 소파를 생각했다. “이 소파는 어떡하지? 가죽도 다 벗겨지고 오래됐는데. 가서 새로 사든지 해야겠다. 냉장고는 어쩌지? 거의 고장이 났는데. 새로 사기엔 돈이 너무 아까운데…. 그나저나 서현이 방 책상은 어떡할까? 새 집에 들어가려나? 들어가겠다! 에어컨은 가져갈까? 집이 작아서 잠깐만 켜도 시원해질 테니까 가져가야지. 찬영이 인형들은 짐 되니까 그냥 버릴까? 아니야. 자기 돈으로 열심히 모은 건데 챙겨가자. 냄새 나는 저 햄스터들은 누구한테 줘 버릴까? 에이, 그냥 데려가자. 커튼은 삶아서 가져갈까? 그냥 이사 간 다음에 세탁해야겠다.” 엄마는 혼잣말을 마친 뒤 우리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엄마 이제 이사박스에 물건 챙길 테니까 너희도 정리 시작해!” 이삿날이 오자 나랑 동생은 아침부터 새집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놀았다. 짜장면도 먹었다. 옆집에 사는 아림이 언니랑도 놀았다. 이 집에서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물건들은 빠진 것 없이 무사히 옮겨졌다. 엄마의 잔소리와 혼잣말은 중요하다.’

이사를 앞둔 어른의 혼잣말은 길고도 길다. 신경 써서 챙겨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집도 마음도 어수선해 보인다. 김서현과 김찬영은 이사의 고단한 부분에는 참여하지 않는 듯하다. 짜장면을 먹고 ‘혼신의 힘을 다해’ 놀기만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가 노는 와중에도 엄마의 혼잣말을 죄다 적었다는 점이다. 일하고 살림하고 이사라는 거사를 치러내는 한 어른의 흔적이 아이의 글에 적혀 있다. 글쓰기 수업에서 문득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 엄마가 뭐라고 했더라?’ 하며 엄마의 대사를 되살렸을 것이다. 틀리게 옮기지 않으려 과거를 유심히 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작업이 글쓰기의 가장 좋은 점일지도 모르겠다. 무심코 지나친 남의 혼잣말조차도 다시 기억하는 것. 나 아닌 사람의 고민도 새삼 곱씹는 것. 아이들이 주어를 타인으로 늘려나가며 잠깐씩 확장되고 연결되는 모습을 수업에서 목격하곤 한다.

<이슬아 |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색한 일과 익숙한 일  (0) 2019.06.11
인생 ‘즐겜’을 위하여  (0) 2019.06.07
주어가 남이 될 때  (0) 2019.06.04
카스텔라와 카스테라 사이에서  (0) 2019.05.30
가장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지만  (0) 2019.05.28
치안의 정치  (0) 2019.05.23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