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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지금, 여기]묘수와 꼼수

경향 신문 2020. 1. 6. 14:54

지난 10여년간 한국인들의 삶을 가장 크게 바꾼 제도는 주 40시간제일 것이다. 이 법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여가다운 여가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허용되었다. 그런데 이 법은 그 취지가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에 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을 이유로 기존 임금을 삭감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법에 포함되었다. 실무 단계에서는 법 개정의 취지가 명백한데 굳이 이 조항이 필요한가라는 논쟁도 있었다. 하지만 노동계의 우려가 컸기 때문에 아예 해석의 여지를 두지 말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법이라는 것은 그 법의 시행을 통해 벌어질 상황을 일일이 조문에 담을 수 없다. 구체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결국 판례를 통해 법의 의미가 확립된다. 그래서 구체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법에 명시적으로 들어 있지 않아도 명민한 판사들은 법의 취지를 살핀다. 실제로 법률 개정안의 첫머리에 나오는 것은 ‘제안 이유’다. 바뀐 법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취지를 살피는 것이야말로 법률 적용의 근본이다.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었다. 패스트트랙에 진입할 때의 원안과는 상당히 달라진, 준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할 수 있다. 컵에 물이 반도 안 찼다고 볼 수도 있고, 그래도 새로운 제도가 도입된 것 자체에 의미를 두자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와중에 가장 해괴망측한 것은 이른바 ‘위성정당’ 논란이다. 지역구에서 우세한 거대정당이 비례의석을 많이 차지하지 못하니, 비례대표만을 노린 별도의 위성정당을 만든 뒤 나중에 합당을 하겠다는 식의 발상이다. 법의 취지와는 전혀 반대되는 적용 방식이다.

법의 취지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후 정치를 농단한 사건으로 ‘사사오입 개헌’이 있다. 1954년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을 위한 개헌안을 표결에 부쳤는데, 가결에 필요한 수는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인 135.333...명이었다. 즉 135명은 3분의 2가 되지 않으므로 136명이 가결에 필요했다. 공교롭게도 찬성은 딱 135명이었고 사회자였던 국회부의장은 부결을 선포했다. 그런데 자유당은 사사오입이라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들어 가결에 필요한 숫자가 135라고 주장하고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결정했다. 소위 ‘자유당 때’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이승만이 3선을 하기는 했지만, 4·19라는 역사의 필연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법률적으로 사사오입 개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위헌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 행위의 본질은 법의 취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꼼수를 동원해 법을 무력화한 데 있다. 그 점에서 사사오입 개헌은 최근의 위성정당 논란과 맥을 같이한다.

위성정당이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은  많이 나왔으니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선관위와 경찰, 검찰이 모두 놀라울 정도로 너그러이 봐주어 그 모든 위험을 용케 피했다고 해보자. 유권자들은 어떻게 판단할까?

지난 총선에서 많은 언론과 정치평론가들이 지금은 사라진 새누리당의 압승을 점쳤다. 무얼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청와대는 친박당을 만들기 위해 오만한 공천개입에 들어갔다. 새누리당은 보수 유권자를 ‘우리가 뭘 하든 찍어줄 사람들’이라고 봤고, 유권자들은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결과는 분명했다.

선거법 개정의 취지는 촛불 이후 주권이 대표되는 방식을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지역의 대표뿐 아니라 정책과 가치, 사회적 약자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국회로 보내자는 취지다. 그 취지에 맞는 공천을 하는 정당이 당연히 유리하다. 그것이 국민의 뜻이기 때문이다. 

바둑 해설을 듣다보면 이런 경우가 있다. “예상치 못한 수인데요? 묘수인가요?” “아니요. 꼼수입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유한국당은 지난해 12월에도 여러 묘수를 뒀다. 민식이법 앞에 필리버스터라든가. 결과는 어땠는가?

<이관후 |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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