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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의 책읽기’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출연제안을 받았을 때 프로그램 이름이 꺼림칙해 일단 고사했다. “저는 명사(名士)가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떠돌아다니는 거리의 삶을 살고 있으니 명사라기보다 동사(動詞)에 가깝지요.” 그 말이 재미있으니 꼭 나와달라는 데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출연해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를 소개했다.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분에 넘치는 별명에 값하느라 연중 전국으로 돌아다닌다. 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는다. 교도소와 노숙인쉼터, 지역자활센터, 공공도서관이 나의 무대다. 뚜벅이로 살다 보니 반나절 넘게 길에서 보낼 때도 있고, 부득이 여관잠을 자기도 한다. 고난의 길이기도 하지만 사실 행복한 인생 공부의 길이다. 길에서 참 많이 배운다.

고속도로를 지날 때면 늘 그 옆의 느린 마을을 보게 된다. 느린 마을의 노인이 느린 걸음으로 더 느려터진 소를 달고 밭으로 나간다. 게으른 강아지가 느리게 짖어댄다. 느린 걸음으로 걷다가 잠시 멈춰선 산들은 머리끄덩이가 뽑히고 명치께에 휑하게 바람구멍이 뚫려도 그저 말없이 돌아누웠을 뿐이다. 고속도로와 느린 마을이 만나 내 삶의 속도를 돌아보게 한다. 거기, 느린 마을에 슬며시 스며들면 좋겠다. 무에 그리 바쁘게 산단 말인가.

노동현장을 전전할 때였다. 주로 모래와 시멘트를 섞는 일을 했는데, 뜻밖에도 거기서 느림의 힘을 깨닫게 됐다. 몇 삽 크게 푸고 허리 펴기를 반복했더니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 암묵지를 알려주셨다. “욕심을 내서 한 삽 크게 뜬다고 일이 빨라지는 게 아니야. 조금씩 떠서 천천히 해봐. 그러면 거짓말처럼 힘도 덜 들고 일도 금방 끝낼 수 있을 거야.” ‘많게, 자주’ 대신 ‘적게, 천천히’가 오랜 경험에서 길어 올린 어르신의 암묵지였다.

“소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이여. 소를 억지로 부리지 말게나.” 말귀가 어두운 소를 모느라 애쓰는 농부를 본 촌로가 해준 말이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고 했던가. 느린 걸음으로 제 길을 가는 소가 어느새 비탈밭에 가르마를 타 놓는다. 내가 몰랐던 삶의 지혜다. 소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이다. 

계절이 계절인데도 신록을 예찬하는 이가 드물다. 바이러스 탓이려니 싶지만, 그것만 핑계할 일이 아니다. 입으로 들어오는 바이러스보다 마음에 들러붙은 공포와 불안, 낭패감이 무기력을 길렀다. 무기력은 곧 조급증으로 이어진다. 시간성의 상실이다. 공간은, 혹은 자연은 시간성의 인식 위에서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과 공간, 인간이라는 삼간(三間)의 어우러짐이 그것이다. 

모두가 시간에 쫓기듯이 움직인다. 이 벗어날 수 없는 질병을 카프카는 ‘조급함’이라고 불렀다. “모든 죄가 파생되어 나오는, 두 가지 주된 인간적인 죄가 있다. 그것은 조급함과 태만함이다. 조급함 때문에 그들은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태만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지 한 가지라 한다면, 그것은 아마 조급함일 것이다. 조급함 때문에 그들은 추방되었고, 조급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조효원 평론집 <다음 책>) 

신은 인간을 채찍이 아니라 시간으로 길들인다. 조급함은 신의 눈치를 보는 일이다. 느림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주체로 바로 설 수 있다. 느림이란 삶과 자연의 이치를 오롯이 삶의 현장 속에서 발견하고 순치하는 일이다.

연전 울산에서 만난 택시기사의 말을 되뇌어 본다. “게으른 놈 놀기 좋고, 부지런한 농부 일하기 좋을 만큼 내리네요.” 비를 피해 급하게 택시에 오르는 내게 해준 말이다. 순간 나의 조급함이 부끄러웠다. 게으른 농부 놀기 좋고 부지런한 농부 일하기 좋을 만큼이라니. 그냥 인문학이다. 시간성의 사유가 핍진한 언어에 얹혀 자연의 흐름을 형상화했다. 느리게 달린 택시는 맞춤한 시간에 나를 강의장에 내려주었다. 아, 소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이다.

<최준영‘책고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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