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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직설]집과 배달

경향 신문 2020. 10. 14. 10:49

대학시절 고시원에 잠깐 기거할 때, 배달 음식은 상상도 못했다. 값싼 학식을 두고 비싼 배달 음식을 시키는 게 돈이 아깝기도 했지만, 반지하 곰팡내와 사람 발이 지나가는 창문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싱크대는커녕 냉장고도 없는 집에서 음식을 먹고 잔반을 치우는 것도 막막했다. 잠자는 곳을 지하에서 지상으로 옮기고, 배달 일을 시작하면서 배달 음식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싱크대와 냉장고가 생겼지만, 도마를 가로로 놓을 수 없었고, 2ℓ짜리 생수라도 넣으면 냉장고가 꽉 찼다. 장을 보고 음식을 하면, 먹은 것보다 쓰레기가 더 많이 나오는 상황에서 배달 음식은 효율적인 식단이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11평짜리 임대아파트에 당첨되니 이제 요리를 해먹어도 될 것 같았지만, 사는 게 바빠서 장보고 요리하고 설거지할 에너지가 없다. 바쁘고 힘들다는 건 사실 핑계고, 이 노동과정을 돈으로 사는 게 편했다. 값싼 백반집도 대형 프랜차이즈와 편의점에 밀려나 대안을 찾기도 힘들다. 배달의 호황은 좁은 방과 여유 없는 시간, 변화된 도시의 결과다.

이불 속 배달소비자에서, 도로 위 배달노동자로 변신하면 다양한 집을 방문할 수 있다. 사람 배고픈 건 똑같지만 사는 곳은 다르다. 하늘에 닿을 듯한 고급아파트는 입구 찾는 것부터가 일이다. 어렵게 입구를 찾아도 출입명부에 이름과 연락처를 쓰고, 경비노동자의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땅 밑의 반지하방도 입구 찾기가 힘들긴 매한가지다. 빨간 벽돌의 다가구주택 반지하문은 따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주소는 하나인데 문이 2~3개다. 눈에 띄는 대문 초인종을 섣불리 눌렀다가는 주인집으로 연결돼 주인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낡은 건물엔 초인종이 고장 난 경우가 많아 손님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 종종 샤워를 하거나 잠을 자거나, 게임을 한다고 전화를 안 받는 경우가 있는데, 고함을 치거나 오토바이 경적을 신경질적으로 빵빵거릴 수밖에 없다. 방의 호수가 희미한 매직으로 그려져 찾기 힘든 집, 주소지에 1층이라고 적혀 있어 올라갔더니 반지하방이라 다시 내려갔던 빌라, 계단 경사가 너무 가팔라 기어서 올라가야 하는 옥탑방, 수십개의 방이 잘게 쪼개진 고시원에 호수를 써놓지 않은 손님 등을 만나면 거친 숨과 욕이 섞여 나온다.

이런 집을 연속으로 만나면 못 참고 아파트 경비노동자에게, 고시원과 반지하방의 세입자에게 짜증을 낸다. 주민에게 배달을 올려보내도 되냐고 공손히 전화하는 경비노동자의 목소리와, 신발장 하나 놓을 곳 없는 좁은 현관문이 쾅 하고 닫힐 때면 죽비를 맞은 듯 정신이 반짝 든다. 화를 낼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건 나다.

최근 ‘서울시 고시원 보고서-거처 상태 및 거주 가구실태조사’가 발표됐다. 냉장고 하나를 18명이 같이 쓰고, 90% 이상이 공용부엌을 사용한다고 한다. 주소가 제대로 나와 있지 않은 곳도 있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눈치 보지 않고 따뜻한 밥 한끼 먹고 싶은 이들이, 배달이라도 맘 편히 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배달노동자가 집을 찾느라 손님과 실랑이하지 않아도 되는 집 정도는 너무 소박한 소망이 아닌가.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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