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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진실은 진부하다

경향 신문 2015. 2. 23. 21:00

어떤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내게도 그런 책이 몇 권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세르반테스 작품인 <돈키호테>다. 아마도 어린 시절에 읽은 <돈키호테>는 요약본이었을 테지만 처음으로 완역본을 접한 뒤로도 두어 번을 더 읽었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왜 <돈키호테>를 두고 최초의 소설이라고 일컫는지를 납득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단지 최초의 소설일 뿐만 아니라 소설의 가능성 자체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돈키호테>를 거듭 읽어가는 과정이 감탄에서 또 다른 감탄으로 이어지는 형태였다면 <논어>를 읽는 과정은 혐오에서 공감으로 공감에서 경탄으로, 그러니까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으나 결국 완벽하게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된 독서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젊은 시절에 <논어>를 무척이나 혐오했다. 그 시절에는 제대로 읽어볼 생각도 없었지만 몇 구절 읽고 나면 하품이 나왔다. 내가 <논어>를 진부하고 무가치한 책으로 여긴 까닭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별로 주의를 기울이고 싶지 않아서였고 무엇보다 그 시절의 내게 <논어>는 하나의 처세술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는 처세술을 혐오해도 좋을 만큼 젊었다.

살면서 많은 좌절을 겪었다. 어느 날 문득 별 기대 없이 <논어>를 펴들었는데 첫머리에서 만난 낯익은 구절이 새삼 가슴에 다가왔다. "때때로 익히고 배우는 즐거움은 생계에 밀려난 지 오래였고 오래된 벗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살아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렵지 않던가.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라 할 만하지 않은가."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 <논어>를 펴들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익숙한 구절들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다. 불혹을 넘겨 간신히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진실이란 비밀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외려 진실은 우리 눈앞에 너무나 버젓이 놓여 있어 우리가 지나치고 마는 그 무엇에 가까우며 진정으로 진실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는 진실이 무엇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연극 '돈키호테'의 한 장면 (출처 : 경향DB)


우리가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정권 아래 외롭고 쓸쓸한 삶을 겨우 영위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진실이냐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실이 무엇인지 몰라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정권을 용납하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따지는 것보다 진실을 실현하는 게 중요하다. 진실을 실현한다는 건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소설 <빌더무트라는 이름의 사내>에 등장하는 판사 빌더무트처럼 ‘세계와 한 몸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항상 진실을 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물려받았다. 그는 판사직을 수행하면서 진실만을 선택해 왔다는 자부심을 지녔으나 같은 성을 지닌 살인자를 재판하는 과정에서 그가 지금까지 선택한 진실은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진실이 통용 가능한 대중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진실과는 무관한 존재가 되어버림을 통감하면서 스스로 판사직을 그만둔다.

그가 한평생 진실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면 할수록 진실이 한 걸음 더 멀리 도망가 버린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세계에 몰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판사 빌더무트의 실수는 진실을 우리가 반드시 찾아내고 밝혀내야 할 비밀스러운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끔찍하게도 진실은 진부하다. 다시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할 만큼 평범하고 지루하다. 평범하고 지루한 탓에 아무도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 말하자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저 굴뚝 위에 올라 고립을 자처한 이유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감당하지 않으려 했던 일, 즉 진실을 실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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