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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불가능 토큰(NFT) 소식이 뜨겁다. 누구는 작품을 얼마에, 누구는 방귀 소리(!)를 얼마에 팔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많이 들었다. 나는 문예이론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발터 베냐민을 생각한다.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그는 ‘아우라의 상실’에 대해 썼다. 아우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예술작품에도 사람에도 사물에도 그는 이 말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맥락은 뚜렷하다. 그는 아우라의 상실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다. 아우라가 사라지면 “평등성의 감각”이 발전하리라 기대했다. 사회주의를 좋아하던 지식인답다.

글의 경우를 보자. 옛날에는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보다 훨씬 적었다. 글쓰기에 아우라가 있던 시절이다. 그러다 “신문이 보급”됐고 많은 독자가 필자로 합류했다. 베냐민은 자기 때 이미 “작가와 대중의 본질적 차이는 사라졌다”고 봤다. 글의 아우라 역시 사라졌다.

영화는 어떤가. “오늘날은 (전문 배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영화에 출연할 수가 있다.” 베냐민이 보기에는 긍정적인 변화다. 반면 아우라를 되살리려는 쪽도 있다. 예술의 진보를 마뜩잖아 하는 세력이겠다. 예를 들어 영화 자본은 “아우라의 위축에 대항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유인’을 만들어낸다. 스타 숭배를 장려한다”.

베냐민이 이 주장을 편 때가 1935년이다. 그가 2021년에 나타나 블로그와 유튜브를 본다면 ‘창작자와 감상자의 구별이 사라졌다’며 반길 터이다. 반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셀럽과 아이돌 팬덤 현상은 달가워할 것 같지 않다.

NFT는 어떻게 볼까. 나는 처음에 NFT가 ‘없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똑같은 디지털 복제본 가운데 하나를 찍어 ‘유일무이함’을 부과하니 말이다. 반대로 NFT 때문에 아우라의 붕괴가 심해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창작자가 아닌 사람이 남의 창작품을 NFT 시장에 내놓아도 지금은 막을 방법이 없다는 뉴스를 보면 그렇다.

문제는 창작자다. 나는 창작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창작물의 아우라가 되살아나는 쪽, 그쪽이 솔직히 내가 밥벌이하기에는 좋다. NFT를 처음 접하고 “작품을 팔 새로운 방법이 생겼구나” 하며 솔깃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고민이다. 베냐민의 도식대로라면, 나는 예술의 진보를 바라는 사람들과는 반대편에 섰나? 사라져야 할 창작자의 특권을 지키고 싶어 하는 적폐인가? 어렵다. 옛날에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던 문제다. 이런 고민마저도 문예이론이라는 분야에 아우라가 살아있던 지난 시대의 유습 같다는 생각도 든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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