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사 계단을 올라가는데 구수한 냄새가 났다. 연탄불에 타는 밤 껍질 냄새. 지상에 올라서고 보니 역시나 군밤 할머니가 있었다. 옆에는 김밥과 바람떡 아주머니. 그 옆에는 양말과 이태리타월 할아버지. 아 이 익숙한 조합. 오 이 정겨운 가락. 

“김밥이요 김밥, 금방 만든 김밥이요, 맛있는 김밥 있어요, 김밥 드세요 김밥.” 수년 전 이곳을 지날 때도 딱 이 조합 이 가락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의 군밤화덕이 지금의 군밤화덕인지, 그때의 가락 주인이 지금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쩐지 군밤 할머니만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믿고 싶어졌다. 그래서 짐짓 속으로 알은척을 했다. “저 할머니는 늙지도 않으시네”라고. 그렇게 속으로 말하고 나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내 할머니는 생전에 밤 깎는 일을 오래 하셨다. 알이 굵은 생밤을 받아 겉껍질을 벗겨내고 밤칼을 이용해 속껍질을 깎아내는 단순한 일이었는데, 속살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각을 유지하며 밤알 모양을 예쁘게 만들어야 해서, 칼질을 하는 데 나름의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했다. 할머니가 깎아낸 생밤은 다이아몬드 커팅처럼 아름다웠다. 

한 포대를 깎아 얼마를 받았는지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앉아 밤칼을 놀리는 대가로는 턱없이 적은 돈이었음은 확실하다. 고까짓것 얼마나 번다고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칼질을 하느냐 병원비가 더 나오겠다 만류를 해도, 늙은이라고 손을 놀리고 앉았으면 못 쓰는 법이라며 소일거리로도 그만 한 게 없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평소 욕심 같은 건 없는 사람이었으나 밤 깎는 철만 되면 이상하게 경쟁심이 솟아나서, 다른 밤 깎는 할머니들을 안방으로 불러 모아 함께 일하기를 좋아했고, 그날 저녁 그들보다 더 많은 양을 채웠다는 것을 은근한 자랑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내가 용돈을 드리는 것보다도 그녀 옆에 앉아 밤 깎는 일의 속도를 높여주는 것을 더 반겼다. 그녀처럼 아름다운 커팅 실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저 겉껍질이나 까 주었을 뿐인데, 깎은 밤을 수거하러 온 사람이 무게를 잴 때면 우리 손녀 덕분에 일등을 하게 되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곤 했다. 

할머니는 병환으로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가 쓰던 밤칼은 내가 물려받았다. 그 칼로 밤을 깎아본 적이 없으니 물려받았다기보다는 그냥 챙겨두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녀에게 밤 커팅하는 법이라도 제대로 배워둘 걸, 제사상에 얹을 밤을 치면서 뒤늦게 후회했다. 그저 겉껍질 조금 까주는 걸로 치하를 받을 게 아니었다. 할머니만큼 예쁘게 깎은 밤알을 포대에 그득그득 채워줬어야 했다. 일을 하지 마시라 만류할 게 아니라, 그녀의 즐거운 승리감에 손을 보탰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내게 처음으로 밤목걸이를 만들어준 사람도 그녀였다. 사실은 삶은 밤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내 놓으라고 내가 먼저 떼를 써서 받아낸 것이었다. 명주실에 꿰어 목걸이처럼 만든 밤 목걸이. 가을운동회 때 교문 앞 노점상에서 팔던 밤 목걸이. 실과 바늘을 손에 쥐여주기까지 하면서 딱 그 모양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먹는 걸로 장난을 치면 안된다는 할머니를 설득했다. 설득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웠다. 그것이 협박이든 설득이든 부탁이든, 발을 동동 구르며 만들어달라는 손녀의 청을 거절할 할머니는 없었을 것이다. 

밤 목걸이는 내게 특별한 물건이었다. 운동회가 열리는 교문 앞 노점상. 솜사탕이며 번데기며 김밥이며 삶은 계란은 봄이건 여름이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지만, 삶은 밤 목걸이만큼은 가을운동회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운동에는 젬병이라 공책 하나 스탬프 하나 받지 못한 내가 메달처럼 걸고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누구나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계주 경기에서 너 때문에 꼴등을 했다는 비난을 잠시 잊을 수 있었으니까. 그때 나는 할머니의 손을 빌려 우승자의 기쁨을 느꼈다.

군밤 냄새는 오래도록 내 뒤를 쫓아왔다. 군밤 냄새가 이토록 진한 걸 보니 겨울은 겨울이다 싶었다. 공기가 쨍하게 차갑고 메마를수록 더 명징해지는 겨울 냄새. 한 봉지 사서 옷 속에 품고, 누군가에게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냄새. 껍질을 내가 깔 테니 너는 그냥 낼름낼름 받아먹어. 누군가의 입에 맨질맨질한 밤알을 넣어주며 도란도란 밤을 지새우고 싶은 냄새. 누군가의 목에 삶은 밤 목걸이를 걸어주고 싶은 냄새. 군밤은 이리도 따뜻한 냄새를 풍기는데, 한길에서 밤을 굽는 저 할머니는 더 추워지겠구나, 마음이 짠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저 군밤 할머니가 더 늙지도 말고 더 오래도록 저 자리에 앉아 밤을 구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수년 뒤에 또 저 길을 지나갈 때, “저 할머니는 정말 늙지도 않으시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늙지도 않는 할머니가 연탄불에 구운 군밤을 가슴에 품고 걷는 겨울밤. 그 길 끝에 그리운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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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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