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오고 있다는데도 길을 나선 건 순전히 무기력 때문이었다. 특별히 심란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맥이 툭 풀린 상태로 며칠이 흘렀고, 머릿속에서 위험신호가 울렸고, 몸을 밀어서 심장과 머리를 움직이라는 한 시인의 말이 떠올랐고, 불현듯 일어나 집을 나서게 된 것이었다. 무기력을 털어내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 태풍은 제주를 지나 목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북진 중이라고 했다.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바깥의 바람은 수상함을 넘어 노골적인 경고를 뿜어내고 있었다. 도적떼처럼 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시커먼 구름들하며, 날아다니고 넘어지고 부러지는 온갖 움직임들이 제법 심란하고 꽤나 위험하게 느껴졌다. 정처 없이 행복, 번영, 진흥의 이름이 붙은 길을 걷다가 도착한 곳은 재래시장이었다. 

시장은 추석 대목을 앞둔 주말임을 감안하면 한산한 편이었다. 푸덕거리는 천막을 옭아매고 입간판이나 설치물들을 들여놓는 손길이 분주했다. 그 와중에 고구마줄거리 껍질을 벗기고 있는 노인의 손놀림에는 서두름이 없었다. 그 일은 조급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법이다. 빈 소쿠리를 흘끔거리며 안달한다고 능률이 오를 수 없는, 손과 손톱이 저절로 움직이게 두면 어느 결엔가 채워진 소쿠리를 발견하게 되는, 무념무상이 최고 기술인 그런 종류의 일이다. 태풍이 오고 있는데 고구마줄거리 껍질 벗기기라니. 나는 어쩌면 그걸 보기 위해 길을 나섰는지도 몰랐다. 시장 할머니들 손끝에서 하염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 그리하여 채워진 한 소쿠리의 보드라운 고구마줄거리나 말끔히 다듬어진 쪽파나 부추 같은 것들. 그리고 어쩌면 나 또한 그럴 만한 거리를 찾아내 무념무상의 기술을 발휘하길 원했는지도. 그리하여 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콩나물 가게였다. 한 소쿠리 사서 대가리와 잔뿌리를 제거하리라. 말끔하게, 하염없이. 

그런데 문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콩나물을 얼마나 달라고 해야 하나. 천원? 이천원? 오천원? 일단 콩나물 가격이 얼마인지를 몰랐고, 얼마치를 사야 노동의 정도에 이르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시장에 와서 콩나물을 산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콩나물을 구입한 것은, 포장지에 포장되어 나오는 제품으로, 그것도 인터넷 클릭 몇 번에 새벽에 배송까지 받는 방식이었으니. 그게 대략 얼마쯤 됐더라? 

식당을 하는 동안에는 거의 매일 시장에 갔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시장에 가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무엇이 제철을 맞아 기름이 돌고 살이 올랐는지. 올해 양파나 배추의 작황이 어땠는지. 폭염이나 장마가 올해 상추와 깻잎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서해의 꽃게나 갑오징어의 어획량이 어떻게 줄어가고 있는지. 모든 척도는 가격이었다. 시장가격은 요식업에 아주 민감한 사항이었다. 피부에 와 닿는 정도가 아니라 폐부를 찌르는 정도의 체감. 어제의 가격과 오늘의 가격, 여름의 가격과 겨울의 가격. 그러고 보니 오뉴월 바지락도 지나가고 여름 무화과가 끝물에 이른 것도 모르고 지나왔구나. 어쩐지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순간. 아무리 시장에서 멀어졌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콩나물 가격을 몰라? 이래저래 복잡한 머리를 굴려, 나름 정교한 계산을 거친 뒤, 콩나물을 청했다. 

콩나물 이천원어치가 그렇게 많을 줄 미처 몰랐다. 주인아주머니가 담고 또 담고 마지막으로 꾹꾹 눌러 담은 콩나물은 20ℓ쯤 되는 커다란 봉지를 채우고 넘쳐서, 내게 건네주는 사이 벌써 콩나물 몇 줄기가 봉지를 비어져 나올 정도였다. ‘콩나물 가격이라도 아껴서’라는 말이 실감나는 양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통용되었던 그 말이 여전히 유효한 것도 놀라웠고, 기껏해야 콩나물인데 손가락에 자국이 생길 정도로 무거운 것도 놀라웠다. 뜬금없이 만원버스와 콩나물시루 같은 단어들이 생각나면서, 이걸 언제 다 다듬고 언제 다 먹나,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천원어치의 거대한 콩나물 봉지를 받아들고 시장을 빠져나왔을 때, 바람은 조금 더 신경질적이 되어 있었다. 태풍의 도착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집으로 곧장 돌아가야 했으나, 발걸음은 집을 지나쳐 등산로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그곳 음식점에 콩나물을 배달하러 가는 사람처럼, 하기 싫은 일감을 피해 도망친 사람처럼. 이윽고 도착한 등산로 입구는 이미 부러진 나뭇가지들로 어지러웠고, 나무들은 온몸을 비틀며 태풍과 맞서거니 물러서거니 하고 있었다. 굴참나무 아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자리에서 태풍을 맞으리라 마음먹었다. 숲의 나무들이 그러는 것처럼 태풍을 온몸으로 통과하고 나면, 무력의 잔가지들을 다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곧 자리를 떠야만 했다. 우박처럼 떨어지는 도토리 때문에. 툭 부러져 어깨를 내리친 굵은 나뭇가지 때문에. 갑자기 굵어진 빗방울 때문에. 콩나물 봉지를 머리에 인 채 집을 향해 냅다 뛰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 많던 콩나물은 반쯤 남아 있었다. 태풍을 통과하겠다더니, 빗방울 좀 피해보겠다고. 결국 그날 나는 문단속을 단단히 한 다음, 창으로 태풍의 기세를 훔쳐보며, 반으로 줄인 무념무상의 노동을 수행했다. 나머지 반은 태풍의 몫이었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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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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