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의 <친애하고, 친애하는>(현대문학, 2019)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나와 엄마, 그리고 엄마의 엄마. 이 소설은 삼대(三代)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여성으로서 해당 시기를 어떻게 통과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삶은 신산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엄마들은 딸이 앞으로 살아갈 삶은 훨씬 더 나았으면 한다. 나와 같지 않은 삶을 꿈꾸는 일은 나의 삶을 돌이켜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비단 엄마와 딸 사이뿐만 아니라 많은 관계에서 감정은 평면적이지 않다. 좋으면서도 싫고 한없이 고마워하면서도 못내 서운하고 사랑하면서도 틈틈이 미워한다. 이 모순된 감정들은 방패로 칼을 찌르는 것만큼이나 이상하지만, 우리는 어찌어찌 그 상황을 모면하면서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관계는 단출해졌을지언정, 그 관계 속에는 이미 역사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복기하면서 ‘그땐 그랬지’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굳이 이전을 톺아보는 대화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모르는 게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서 서로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정 상황에 처했을 때 응당 해야 하는 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야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가족이어서 더 말 못하는 일도 있고 가족이기 때문에 애써 숨겨야 하는 일도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가족에게는 자국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 자국은 불에 덴 자리처럼 바라볼 때마다 무언가를 환기시킨다. 예전에 있었던 일, 그때 들었던 그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는 거의 매일, 남겨진 자국을 바라보며 동시에 새로운 자국을 내고 있다.

소설 속에서 할머니는 손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봐라, 인아야. 세상엔 다른 것보다 더 쉽게 부서지는 것도 있어.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녹두처럼 끈기가 없어서 잘 부서지는 걸 다룰 땐 이렇게, 이렇게 귀중한 것을 만지듯이 다독거리며 부쳐주기만 하면 돼.” 관계도 마찬가지다. 결이 안 맞는다고, 취향이 다르다고 외면하기 일쑤였던 나 자신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 또한 쉽게 부서지는 사람, 취약한 사람이어서 내게 적대적인 사람을 만나면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럴 때면 관계를 낫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알아왔는데도 단둘이 남겨지면 어색한 사이가 있다. 나는 지금껏 그런 순간을 피하려 잔머리를 굴리던 사람이었다. 화장실에 가야 한다고, 전화할 데가 문득 떠올랐다고 말하며 잠시 자리를 뜨기도 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낫게 하려고 실없는 소리를 하는 때도 있었다. 가족에게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감 없이 튀어나오는 말들 중 상당수가 실언이었다. 이해받으려고만 했지 정작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녹두전은 번번이 부서졌다.

친애한다는 것은 친밀히 사랑한다는 것이다. 친밀한 사이, 그러니까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는 일은 상대를 궁금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친밀함이 친애함으로 가닿기 위해서는 상대를 헤아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귀담아들어야 한다. 누군가를 친애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이렇게” 토닥이며 관계를 노릇노릇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서로 좋은 말만 주고받아서는 형성되기 어렵다. 상대의 못난 점이나 부족한 점까지 내가 받아들여야 관계는 다음 단계를 맞이할 수 있다.

백수린은 소설 제목에 ‘친애하다’라는 동사를 두 번 썼다. “친애하고”와 “친애하는” 사이에는 다름 아닌 쉼표가 있다. 나는 그 쉼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사랑하기 위해서, 마침내 친애하기 위해서 들이쉬는 심호흡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참는 태도인가, 이해하기 위한 안간힘인가. 누군가를 친애한다고 말할 때, 그 말에는 빽빽한 쉼표가 담겨 있을 것이다. 내 안에 상대를 아로새기는 작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만간 고향에 가서 엄마에게 물어봐야겠다. 엄마의 인생에 대해 들어둬야겠다. 엄마 인생에 촘촘히 난 자국들을 헤아리며 고백해야겠다. 엄마를 친애한다고. 친애하고, 친애한다고.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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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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