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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네베’는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다. 가로지르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니, 굉장한 번영을 구가하던 대도시였나 보다(<요나서>). 여기에 ‘요나’라는 예언자가 나타나 니네베의 멸망을 선포한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니네베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란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사회의 약자, ‘과부와 고아와 떠돌이’의 하느님이며, 하느님께 대한 죄는 이들의 억압과 착취로 나타난다. 니네베의 번영은 이들 약자의 피땀으로 이뤄졌고, 이들의 울부짖음이 하느님께 닿았나보다. 이 하느님은 이집트의 압제와 수탈에 허덕이던 히브리인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이들을 해방하려 이집트를 쳤었다(<탈출기>).

요나의 경고는 니네베에 들이닥칠 대재앙의 전조로 들렸다. 니네베 사람들은 단식을 선포했고, 임금에서 짐승까지 모두 단식에 들어갔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는 것(<이사야서>), 약자를 향한 사회적 연대 행위다. 억압과 착취를 일삼던 니네베의 근원적 변화를 위한 사회적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과연 그들은 변했을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임박한 파국의 경고를 시대의 징표로 알아들은 니네베 사람들은 극적인 변화를 했고 재앙에서 벗어났다.

코로나19 감염으로 우리는 경험도 상상도 못했던 시간을 지나고 있다. 극도의 혼란과 공포가 삶을 엄습하고 옭아맨다. 당연했던 ‘일상’은 사라지고 거리에서 사람들의 얼굴도 사라졌다. 하지만 결국, 특히 의료진과 보건 당국의 헌신 그리고 시민들의 협력으로 이 사태도 잦아들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이런 희망을 품자, 물음이 쏟아진다. 이 재난으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 니네베만큼 변할 수 있을까?

이번 재난을 계기로 우리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과 평등을 ‘정말’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할까? 잠시의 ‘사회적 거리두기’도 할 수 없는, 감염보다 생계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사회 안전망을 만들자고 마음을 모을까? 바이러스 창궐 이전 ‘평온한’ 때에도 네댓 명의 노동자가 매일 산재로 죽어야 하는 사회, 갑질로 인한 좌절과 분노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삶을 버리는 사회를 안전하고 평등한 정의로운 사회로 바꾸려 할까? ‘김용균’과 ‘문중원’과 ‘이재학’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를 방치한 것에 대한 사회적 참회가 가능할까? 너무도 소중한 우리 일상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재앙이 가능하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핵발전소 같은 위험 시설을 기꺼이 포기할까? 기후재난이 현실이 되기 전 온실가스를 과감히 줄이고 그 불편을 기쁘게 받아들일까? 

아니면, 이 환난을 넘기자마자 우리는 서둘러 익숙한 ‘옛날’로 돌아가려고 할까? 효율과 성장의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비정규’의 굴레를 강요하며 약자의 생명을 볼모로 삼는 일을 계속할까? 기후재난과 핵사고는 있을 수 없다고 고집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훨씬 더 가혹한 재앙, 파국의 문을 스스로 열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가 코로나19를 우리의 ‘진짜’ 문제를 보여주는 시대의 징표로 읽기를, 이 환난의 때를 새 세상을 여는 ‘카이로스’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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