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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

토끼굴

경향 신문 2020. 1. 16. 16:37

지질학자 토끼를 따라가는 샛강 어귀나 노출된 사암층 어디.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오슬오슬 춥다. 토끼털처럼 따스한 옷을 챙겨 입고 나서야 한다. 토끼 똥이 보이면 근처에 분명히 토끼굴이 있을 거다. 토끼를 뒤에서 부르면 휙 돌아보는 까닭은 눈이 뒤에 없기 때문. 시시한 수수께끼.

시베리아 하고도 바이칼 호수에 얼음이 땡땡 얼었겠다. 용기가 대단한 토끼는 앙가라강 얼음강을 건너기도 한다. 시베리아 사람들은 얼음호수를 내다보면서 꼭 토끼굴처럼 생긴 조그만 사우나 공간에 들어가 ‘바냐’를 즐긴다. 나도 러시아에 가면 종종 바냐를 해보곤 한다. 자작나무 잎사귀로 등때기와 허벅지를 자근자근 때리면서 더운 물을 뿌린다. 바냐란 러시아식 전통 사우나. 한 집에서 자작나무를 쪼개 불을 때고 바냐에 초대를 하면 주민들이 보드카와 빵과 청어조림을 들고 모이게 되는데, 어지간한 마을 대소사는 이 바냐 시간에 결정이 다 된다.

달구어진 돌덩이를 바라보며 토끼처럼 빨간 눈으로 이눔의 스키 저눔의 스키 수다를 떨어댄다. 뒤에다가 스키만 집어넣으면 무조건 러시아말 중급. 20도 30도 40도짜리 술을 나눠 마신다. 그러다보면 ‘졸도’할 수도 있다. 토끼굴 바냐를 마치고 나와 횡단열차에 오르면 출출하여 도시락 라면을 사먹게 된다. 러시아에서 ‘도시락’이라는 상표의 네모진 컵라면은 그냥 라면을 뜻하는 대명사다. 러시아 사람들 중에 도시락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기차는 24시간 따뜻한 물을 제공한다. 온수를 붓고 기다리면서 젓가락 대신 포크를 만지작거린다. 토끼가 배춧잎을 조근조근 씹듯이 라면줄기를 후루룩 쩝~ 하고서 밖을 살짝 내다보면 하얀 눈이 삽으로 퍼서 뿌리듯 내려싼다. ‘눈에 맞아서 죽어봐라’ 하는 식으로다가 마구마구 내린다. “펄펄 눈이 옵니다, 마구마구 눈이 옵니다….” 토끼굴 같은 기차칸에서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하며 어디론가 저마다들 흘러서 간다. 당신은 시방 어디로 가는 길인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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