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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시골 할머니집 바로 앞엔 논인지, 밭인지 모를 조그만 땅이 있었다. 한 5~6평 남짓 됐으려나. 밭처럼 보였지만 물이 그득했고, 퍼런 풀들이 빽빽이 덮고 있었다. 어른들은 “거머리 천지”라며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게 ‘미나리꽝’으로 불린다는 건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미나리’는 내 기억 속에서도 참 토속적인 기억에 속한다.

이 촌스러운 이름이 미국 아카데미 영화 역사에 남게 됐다. 6개 부문 수상 후보가 되면서 이번 아카데미 화제의 중심에 있기도 하다. 이 드라마틱한 반전에 국내는 꽤나 흥분한 듯하다. 미국인들로선 뜻도 몰랐을 제목의 영화가 세계 영화산업의 정점과도 같은 무대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에 경탄과 호기심 어린 눈길이 쏟아진다. 1년여 전 영화 <기생충>의 경이를 떠올리기도 한다. 올 4월도 ‘아카데미의 봄’이 될 것 같은 기대감이 가득하다.

사실 영화 <미나리>는 독특하다. 미국 사회 속 ‘이방인’의 이야기다. 한국어 대사가 절반을 넘고 한국계 배우가 대거 출연하지만, 미국 자본으로 미국을 배경으로 만든 ‘미국 영화’다. 혼종의 정체성을 지닌 영화다. 어떤 면에서 <기생충>과는 반대다. <미나리>의 성공은 ‘가족’이라는 공통의 감성 덕택이지만, 특히 그들과 다른 한국적 가족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간 때문이라고 한다. 토속적 제목처럼 ‘로컬(지역적)’한 정서에 기댄다. 반면 <기생충>은 ‘서울판 지하생활자의 수기’ 같은 지금 한국의 장면을 담았지만, 현대사회의 빈곤과 양극화라는 ‘글로벌’한 보편성에 호소한 측면이 크다.

오늘날 문화는 민족적 또는 국가적 자부심이나 경쟁심리가 투사되는 최전선이다. ‘K팝’ ‘한류’ 같은 브랜드들처럼 말이다. ‘세계시장’과 ‘상품’의 이념이 만든 현상이다. 한국의 확대라는 ‘인정심리’와 ‘개척자’ 이미지에 대한 열광이 배경에 어른거린다. 미국 영화 <미나리>와 국내의 환호가 연결되는 접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이 같은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한국적 문화에 다른 세계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 다가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화의 힘이 성장한 증거일 수도 있다. 과거처럼 권력의 필요로 강제생산된 ‘국뽕’ 문화도 아니지 않은가. 다만 성취와 환호의 내면을 정직하게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문화는 정신과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미치는 힘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화가 그저 우월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럴 때 비극이 시작됐음을 우리는 잘 안다. 또 ‘투자 대 성과’의 산업 이데올로기에 점령당할수록 문화는 시들어간다.

따라서 질문할 수밖에 없다. <기생충>과 <미나리>의 성취에 환호하는 우리는 ‘우리 밖의 문화를 얼마나 아는가’. 그리고 ‘다른 문화에 얼마나 관대한가’. 그 대답은 K팝, 한류가 그저 국뽕스러운 소란스러움으로 끝나느냐 아니냐의 갈림길이 될 것이다. 문화가 존재들 사이 이해의 경계를 넓히고 거리를 좁히는 것이라면, 또 서로 섞이며 육체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 문화만의 성취를 이야기하고 바라봐선 안 된다. 삶의 터전을 공유하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의 시선이 존재하는 한국사회가 말하는 한류는 문화적 국수주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관용과 다양성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실제 우리가 인정받고 싶어하는 문화들은 점점 더 과거 그들의 장벽을 허물고 있음을 본다. 이번 아카데미의 흐름이 되고 있는 아시안 웨이브나 그래미를 점령한 흑인·여성의 전진, 인종·젠더적 다양성을 실험하며 넓혀가는 디즈니와 넷플릭스의 전략 등. 문화와 밀착한 산업은 글로벌화·대중화하는 ‘세계시장’에서 이 같은 일이 ‘영리한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느낀다.

한류든 K팝이든 냉정하게 계산해볼 때가 됐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말이다. 댄스음악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기에도 통기타 가수들을 위해 무대를 만든 학전과 그곳을 찾은 관객들, ‘봉준호 세대’를 가능케 한 다양하고 무모한 도전들이 있었다. 무수한 거리의 댄서·인디음악·독립영화의 다양성과 자유로움이 ‘한국 음악·영화가 한류가 되고 K팝이 될 수 있다’는 상상도 하게 했다. 그런 상상이 문화의 ‘퀀텀 점프’를 현실로 만들었다.

기억 속 가장 토속적 단어인 ‘미나리’에서 시작된 단상은 여기까지 왔다. 이것만 봐도 문화의 상상은 무한하지 않은가. 미국 작가 셔먼 알렉시의 재치 넘치는 ‘시=분노×상상력’이라는 문장을 패러디하면 ‘문화=다양성×상상력’이라 하겠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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