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처음엔 덤덤했고, 나중엔 빠져들었다. 정치에서 문화 쪽으로 옮긴 변화 중 하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게 됐다는 것이다. 10여년 만이었다. 반쯤은 ‘일’이란 명분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였을 것이다. TV에서도 볼 수 있는 걸 굳이 극장에서…. 더구나 요즘은 TV에서 옛 영화부터 최신 영화까지 마음대로 골라 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몰입감이 달랐다. 끝을 향할수록 어둠 속에서 하나에 몰입했다. 영화 한 편의 러닝타임이 이렇게 짧았나. TV에선 느끼지 못했던 시간 감각이었다. 실상 영화에만 시간을 바치는 일 자체가 TV에선 없었다. 화면을 응시하면서도 반쯤은 다른 생각들이 그 시간을 공유했으리라. 사방이 막힌 영화관에선 애당초 그런 ‘멀티’가 허용되지 않는다. 과거의 나는 영화라는 하나에 시간을 모두 투입하는 일을 사치로 여겼던 것은 아닐까. 척추에 긴장의 뼈를 덧대던 시절이었으니….

TV는 휴식이지만, 영화관은 그것을 넘어선다. 무언가를 ‘향유’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그것으로 채우는…. 앞자리에 ‘삶’이란 단어를 넣어도 좋으리라.

수년 전 정말 무릎을 ‘탁’ 친 카피가 있었다. ‘저녁이 있는 삶.’ 정치권의 카피란 게 기이할 정도였다. 예쁘고 발랄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어떤 것도 경쟁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해서도 아니었다. 그 속에 우리 사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느낀 때문이었다.

가족이되 저녁을 공유할 수 없는 가족. 아빠는 직장이나 거리의 술집에서, 아이들은 학원에서, 엄마는 또 어디에서…. 각자 똑똑 부러진 가지들처럼 ‘혼자’로 존재하는 우리 사회 풍경이 머릿속으로 확 들어왔다. 그 저녁의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은 ‘나’지만, 그 속에 내 삶은 없다. 현기증 나도록 달려가는 사회에 속박된 노예 같은 ‘나의 시간’만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인지하지 않았거나, 인지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게다. 결국 저녁을 회복하는 건 ‘내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작은 ‘삶의 질’은 곧 나의 존엄이다.

영화를 ‘향유’한 작은 일에서 불현듯 그런 상념을 떠올린 것은 불안함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삶의 질’을 향해 가고 있고, 갈 수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불안함이다. 분명 한때 그런 기대가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희미한 그림자로 흔들린다. 불온한 신자유주의 세상에서도 저녁이 있는 ‘삶의 질’을 이뤄낼 것이라 기대했던 정권의 능력과 사회변화가 실상 아니거나, 너무 더딘 현실 때문이다.

삶의 질을 거론하기조차 미안한 일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폭염 속 창문도 없는 한 평 쪽방 같은 휴게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을 청소노동자와 컵라면을 챙겨들고 종종걸음을 쳤을 고단한 청년 노동자의 죽음, 무수한 죽음에도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채 작업장으로 향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들에게 땀을 식힐 한 칸과 포근한 한 끼의 시간, 불안함 없는 작업은 불가능한 사치일까.

지난달 현대중공업과 대우해양조선에선 일주일 새 두 명의 하청노동자가 잇따라 목숨을 잃었다. 위험한 작업임에도 기계는 계속 돌아가고, 안전조치는 부족했다. ‘안전 차별’ 속에 지난해 산업재해로 사망한 하청노동자는 312명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알바 등 보이지 않는 ‘현실의 금’들 속에서 삶들은 균열하고 있다.

어떤 면에선 ‘무한경쟁’의 변명 아래 더 견고해진 구분과 서열들이 존재한다. ‘부의 대물림’만을 말함이 아니다. ‘삶의 질’이 어떤 ‘노력의 대가’라거나, 그에 따른 ‘자격’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우리는 ‘자격’이라는 또 다른 신분의 파라미드에 갇히고 있는 셈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부분을 흔히 간과한다”(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한 개인의 ‘노력이란 관념’은 늘 이기적이며 과장되기 마련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견뎌내야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개개인이 싸워 쟁취해야 할 대상인가. 지금의 삶의 질을 유보하면서….

땀을 식히는 한순간이 하루치 행복이고, 하루의 휴식이 일주일을 감당하는 위안이며, 안전조치 하나가 마음의 평화가 되는 세상은 멀리 있지 않다. ‘저녁이 있는 삶’이나 ‘극장의 몰입’처럼 우리들 삶 바로 옆에 있다. 1000만 영화가 속출하는 시대에도 “극장에서 영화 한 편 집중해 보기 힘들다”고 느끼게 만드는 어떤 공포가 그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과거 ‘유령처럼 배회하던 그것’은 지금 ‘신자유주의’라는 확실하고도 실재적인 ‘공포’로 인간과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개개인이 넘기엔 그 공포의 금들은 너무 깊다. 자격이 아닌, 서로의 손을 마주잡는 ‘연대’의 마음만이 이 불온한 시대를 넘을 힘이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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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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