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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침침한 조명과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동네 달건이들이 당구를 치고 있다. 스리 쿠션을 칠 때마다 돈을 주고받는 ‘죽방 당구’가 한창이다. 공이 먼저 맞았느니, 쿠션 먼저 맞았느니 시비가 붙더니 급기야 패싸움까지 벌일 기세다. 당구장 주인이 황급히 싸움을 가라앉히고 음료수를 다시 내와 달랜다. 호기심에 당구장 밖을 기웃거리던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은 소동을 틈타 당구장 안에까지 호기롭게 들어선다. 뒤늦게 알아차린 당구장 주인이 장사 망치려고 작정을 했냐며 호통친다. 못 들은 척 까까머리들이 구석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공을 달라고 해서 신나게 논다.

1980년대 동네 당구장에서 흔히 보던 풍경이다. 당구장은 할 일 없이 빈둥대는 청춘들의 해방구였다. 마음껏 담배 피우고 내기 당구 치고 짜장면을 먹으며 남아돌기만 하는 시간을 죽였다. 저녁이 되면 술판을 벌이기 일쑤였다. 당연히 당구장은 청소년이 출입할 수 없는 유해시설이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영화에서는 항상 당구장이 깡패와 도박꾼의 소굴로 그려졌다. 이러니 당구가 스포츠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이를 바꾸고자 당구인들이 힘을 합쳐 당구를 스포츠로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덕택에 당구가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러는 가운데 2019년 프로당구협회(PBA)가 출범했다. 마케팅 대행사가 돈벌이 수단으로 만든 PBA가 과연 제대로 발이나 뗄 수 있겠냐는 비판이 일었다. 기존 단체는 소속 당구선수가 PBA에 출전할 수 없도록 제재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최정상급 선수는 참여할 수 없었다. 선수 수급에 차질이 빚어졌다. 하지만 교회 숫자와 비교될 만큼 많은 당구장 수를 자랑하는 인프라. 그동안 갈고닦은 재야의 숨은 고수 당구장 주인들이 대거 프로당구에 뛰어들었다. 당구장 주인이 무슨 선수냐며 조롱이 쏟아졌다. 실제 뚜껑을 여니 역동적인 게임 규칙 덕분에 기존 강자는 물론 당구장 주인도 심심찮게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누가 이길지 가늠하기 힘들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최정상급 선수들이 하나둘 참여를 선언했고 세계적인 선수들도 합류했다. 갓 출범한 탓에 이러저러한 논란도 있지만 새로운 프로스포츠로 자리 잡아 가는 중이다.

그중 사회학자인 내 눈을 잡아끈 것은 단연 팀 리그다. 여성과 남성이 만드는 대면적 상호작용의 질서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생한 예시로 보여준다. 한 팀당 6~8명인데, 여자 선수가 2명 이상이어야 한다. 실력만 고려하면 여자 선수는 남자 선수와 승패를 겨룰 처지가 못 된다. 그런데도 여자 선수를 실력 있는 동료이자 경쟁자로 존중해서 승부를 겨룬다. 이런 기대를 받는 여자 선수도 온 힘을 다해 자신만의 독특한 실력을 발휘한다. 이렇듯 상대방을 동등하면서도 독특한 존재인 양 대우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이상이다. 이 선한 거짓말은 불평등한 현실에 엄청난 압박을 가한다. 모두가 동등하기만 하면 끔찍한 전체주의 사회가 된다. 동시에 모두가 독특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답해준다. 현대사회로 접어든다고 해서 초월적 신이 죽는 것이 아니다. 각자 고유한 초월적 신, 즉 가치를 품고 있는 여러 영역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각 영역에서 전문가 집단이 고유한 가치를 창출해서 추구해야 할 구원재(救援財)로 만든다.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자발적으로 그 가치에 헌신하는 인성(personality)이 출현한다. PBA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다양한 가치 영역으로 분화할 수 있을지 알려준다. 무엇보다도 고유한 초월적 신을 창출하고 이에 헌신하면서 내면을 일깨워야 한다. 내면을 가진 참여자들이 만든 성스러운 질서 속에서는 누구나 참여자를 동등하면서도 독특한 인성을 가진 존재로 대우한다. 짐짓 초월적 신을 섬기는 척만 하는 기만적인 행위자가 들어와 분탕질하기 어렵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연재 | 세상읽기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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