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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학교는 모두가 낯선 긴장감 속에서 한 달을 지낸다. 학생들은 새로 만난 교실이 자신을 얼마큼 이해하고 수용해줄지 살피고, 교무실에서는 1년간 어떤 업무를 누가 맡을지에 대한 어려운 협의가 이어진다. 그러는 사이에도 교정의 꽃들은 피어난다. 새별꽃, 봄까치꽃, 조팝나무꽃들이 서로 다른 빛깔로 작고 귀여운 얼굴을 내밀면서, 이제 봄이 되었으니 자기들처럼 한 번쯤은 생생해져 보라는 듯 손짓하며 우리를 부른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봄의 새순들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삶을 그리워한다.

가르침과 배움도 본질적으로는 한 사람이 꽃을 피우고 성장해가는 생생한 기쁨의 과정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은 이런 생생함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왔다. 어떻게 하면 이 본래의 생생함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까? 완벽하게 조각된 작품 앞에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완성품 대신 학생들에게 나무라는 원재료를 주고, 다듬을 수 있는 조각칼을 주고,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준다면, 학생들은 각자의 상상과 경험, 솜씨로 자신만의 조각품을 만들며 자신의 향기를 맡고 자신의 빛깔을 보게 된다. 이럴 때 수업은 배움이라기보다 주제와 사물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만남의 과정이 된다. 그러나 지금처럼 한꺼번에 많은 내용을 학생들의 머리 위에 쏟아부어서는, 그 지식에 파묻혀 학생들의 목소리는 점점 사라져버리고 만다. 시간과 분량에 쫓기며 설명하느라 교사들도 지쳐버리는 수업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더 생생하게 배울 수 있겠는가? 교실에서 가르치는 분량과 내용이 많아질수록 실제로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점점 더 줄어드는 이 역설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모든 학문에는 그 학문의 내용들을 연결해주는 핵심적인 패턴이나 이치가 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장미 홀로그램 필름을 반으로 자르고, 그 절반을 다시 반으로 잘라도 그 조각은 여전히 원래의 장미 전체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모든 교과에도 이러한 홀로그램에 해당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한자가 만들어진 원리를 깊이 배움으로써 학생들은 이 원리를 통해서 수많은 한자의 뜻과 음을 훨씬 빠르게 학습할 수 있다. 또 <논어> 문장 두 개를 교사가 다 가르쳐주는 수업보다, 문장을 한 개로 줄여 학생들의 참여로 같이 해석하고, 그 문장의 주제에 대해 학생들이 무엇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생각하고 말하는 수업을 하면, 다음 시간에 다른 문장을 주었을 때,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학생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여러 친구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주제는 더욱 깊고 복잡하게 학생들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들의 사고의 지형을 형성한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은 적은 분량을 깊이 배움으로써 더 많은 내용을 더 빠르게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배움이란 세상과 타인, 자신을 만나는 과정이고 가르친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학생들을 환대하며 교실의 한가운데로 초대하고 그들이 앉을 자리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가르칠 때, 그들은 자신들도 몰랐던 자신의 특성과 가능성을 새롭게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수업의 변화를 위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조춘애 광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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