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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그중엔 더 절대적으로 남에게 제 목숨을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어린이가 그렇다. 온전히 어른에게 제 삶을 맡기고 있다는 점에서 어른에겐 그들을 안전하게 돌보아야 할 절대적 의무가 있다.

비극적인 아동학대 기사가 연일 이어지는 가운데 의료진이나 교육, 아동복지 종사자를 대상으로 하는 아동학대 신고의무제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학대가 의심되는 아동을 만나도 교사들은 신고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가 원치 않아서다. ‘자신 때문에 부모가 경찰에 잡혀갈까봐’ 두려운 아이들은 둘러대며 학대를 부인한다. 신체에 흔적이 없는 경우 정황만으로 신고를 결심하긴 더욱 쉽지 않다.

지난 3월부터 시행된 즉각보호분리제도 허술하다. 학대가 확인되면 즉시 가해자로부터 분리하는 제도를 도입한 지 한 달도 안 돼 전국의 아동일시보호소는 ‘만원’이다. 담당자는 곳곳의 보호소에 연락해 피해 아동을 보낼 빈자리를 찾고 있다. 홀로 낯선 곳에 보내진 아이는 부모에게 매를 맞는 것만큼이나 공포를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 신고의무제나 분리제 모두 사후약방문이란 점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해체된 가정이 갑자기 회복되지 않을 터, 신고나 분리 이후 아이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사후 대처 못지않게 예방책이 필요하다. 지난 1월 국회에서 ‘친권자의 자녀 징계권 조항’을 삭제한 민법 제915조 개정안을 의결하며 한국은 세계에서 62번째로 아동 체벌금지 국가가 됐다. 그러나 ‘무엇이 학대인가’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일본의 소아신경과 의사 도모다 아케미는 “중요한 것은 아이에 대한 행위가 ‘학대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로 인해 아이가 ‘상처를 입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부모라는 이름>, 마인더브)”이라고 말한다. 훈육을 앞세운 체벌은 물론 생각 없이 내뱉는 언어폭력부터 과한 과업 등으로 심리적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 장난을 빙자한 성희롱까지 모두 아동학대다.

혹자는 말한다. 그럼 훈육은 어떻게 하느냐고, 오냐오냐 아이를 떠받들고 살라는 뜻이냐고. 이건 훈육의 문제가 아니라 ‘어린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는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성인이 제 말을 듣지 않는다고 머리를 쥐어박거나 등짝 스매싱을 날리거나 눈을 흘기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서 핀잔을 주거나 실수를 놀리듯 이야기하지 않고, 예쁘다고 볼을 꼬집거나 함부로 몸에 손을 대지도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 모든 행위는 우리가 어린이라는 존재를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비극적인 아동학대 기사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며 미안하다고 말한다. 떠난 아이들에 대한 사죄와 함께 필요한 것은 곁에 있는 아이들을 지키는 일이다. 더는 이 땅에 굶어죽고 맞아죽는 어린 생명이 없으려면, 가슴 한가운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새긴 채 우울한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들이 없으려면 집에서, 학교에서, 동네에서 만나는 지금 내 곁의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아동학대를 끊을 수 있는 실마리는 그 치열한 고민 속에 있다.

장희숙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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