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과 일주일에 한 번 글쓰기 수업을 한다. 짧은 글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눈 후 주제를 잡아 한 편의 글을 쓰는데, 이번 주에는 20대 남성이 쓴 글을 읽었다. 한국의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스스로 젠더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서 얼마나 애써왔는지를 기록한 글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중요한 것을 왜 스스로 알아나갈 수밖에 없었는지 통탄하는 글을 읽고, 아이들은 삶에 꼭 필요하지만 어디서도 배울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고 했다. 

“대화의 기술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빠가 서로 대화하다가 말문 막히면 화내고 소리 지르는 게 너무 싫어요.” “알바하다가 월급 떼이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년부터 알바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몰라요.” “계좌이체, 무통장 입금 이런 거 너무 어려워요.” “싫은데도 말 못하고 참기만 하다가 친구들 사이에 호구가 된 적이 있어요.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내 감정을 정확히 전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저는 연애만 하면 꼭 안 좋게 끝나요. 잘 헤어지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맞아 맞아, 서로 추임새를 넣어가며 아이들이 나열한 이 배움의 목록들은 생생한 삶의 기술이다. ‘함께 살아가는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죽어 있는 교과 지식을 넘어 ‘삶의 배움’을 표방하는 대안학교에서는 비형식적 교육과정 속에서 이런 문제들을 다룬다. 심각한 문제나 갈등이 발생하면 예정되어 있던 수업을 멈추고라도 모두 둘러앉는다. 매뉴얼도 안 통하고 똑 부러지는 해결책도 얻기 힘든 이 지난한 과정에 때론 ‘질리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교사도 아이들도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물을 수밖에 없다. 미결 과제로 남는 일들도 많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수업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알아가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교사의 훈계나 학교폭력위원회의 징계로는 결코 도출해낼 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도 종종 연출된다. 

얼마 전 받은 우편물에 작은 책자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시와 같은 삶을 살 줄 알았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낸 시집이라고, 중·고 통합 대안학교에서 6년을 함께 보낸 제자가 쓴 거였다. 입학식 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아이가 들어서는데 작은 분노 덩어리가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폭력을 쓰는 그 아이로 인해 우리는 자주 둘러앉았다. 얻어맞은 아이도 안쓰럽고, 그렇게밖에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그 녀석도 가여웠다. 때로 벌을 받기도 하고 때로 사람들의 이해를 받기도 하면서 시간은 흘렀다. 다가갈 방법을 몰라 애가 탈 때마다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주먹을 휘두르고 나서 혼자 숨어 우는 녀석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던 기억도 난다. 그러던 소년이 서른 살 가까운 청년이 되어 “시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니, 인간은 참으로 경이로운 존재다. 교육이 그 아이를 변화시킨 게 아니라, 본디 그러한 내면을 가진 아이였다. 본연의 자신을 찾을 수 있게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아파하며 기다려준 덕이 클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미래교육 담론으로 떠들썩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변함이 없다. 아이들이 알고 싶다는, 그러나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삶의 기술’은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아이들이 갈망하는 그 배움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것, 어쩌면 그게 교육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