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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국민의힘은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에게 국내에서 확진자 수만 세지 말고 당장 해외로 나가 백신을 구해오라고 다그친 적이 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도 방역실패의 대표적 사례로 백신 수급 문제를 꼽았다. 하지만 데이터가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방역 성공과 백신 성공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미국과 영국 등 방역에 처참하게 실패한 강대국들이 백신민족주의를 앞세워 싹쓸이를 하고 있고, 한국처럼 방역에 비교적 성공한 나라들은 싹쓸이할 국력도 부족하고 그래야 할 필요성도 덜 느낀다. 한국의 백신 수급이 비교적 늦은 것이 과연 K방역의 성공에 도취되었기 때문인지, 사상 유례없는 속도와 방식으로 개발된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신중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야당과 언론의 비판 이후 7700만명분을 확보했다고 하지만 그중 아직까지 승인받지 못한 백신이나 수급 일정 등을 감안하면 현실은 숫자가 보여주는 장밋빛 이미지보다 훨씬 복잡해질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국민의힘은 “다른 나라들은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질 좋은 백신”을 맞는다며 “창피하지 않으냐”고 다그치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은 많은 과학자들은 경악했다. 백신에 질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고, 우리가 계약한 것은 질 나쁜 백신이라는 가짜뉴스는 백신에 대한 근거 없는 거부감만 부풀려서 집단면역에 도달하는 속도를 늦추는 백해무익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아스트라제네카의 경우는 고령층에 대한 효과가 낮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고령층에 대한 효과를 판단할 통계 자료가 아직 충분치 않다는 말과 백신의 질이 낮거나 혹은 위험하다는 말은 아무 관계가 없다. 어느 국제기구나 과학저널에서도 이 백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이 초기에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위주로 계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나온 주요 백신의 계약 현황을 세계적으로 보면, 압도적인 베스트셀러는 아스트라제네카이다. 화이자의 1.5배, 모더나의 6배 이상을 계약했다. 당연히 대부분의 국가들은 아스트라제네카와 가장 많은 계약을 맺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옥스퍼드대학의 과학자들은 커피 한잔 가격보다 싼값에 가난한 나라들을 포함해 인류를 지킬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하고자 했고, 팬데믹이 종식될 때까지 이윤을 남기지 않기로 약속한 아스트라제네카를 생산 파트너로 선택했다. 비록 실수와 불운이 겹치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됐지만, 가격과 생산량을 생각할 때 최종적으로 코로나19를 종식하는 승리투수는 아스트라제네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감염병과 백신의 정치는 전 세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어왔다. 미국에서 마스크 착용 거부가 트럼프 지지의 상징이 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미국의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코로나19 대응에 완벽하게 실패한 트럼프가 떠나고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지만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있다. 백신민족주의가 그것이다. 캐나다는 인구 대비 백신 확보율이 세계 47위이자 미국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처지인데, 바이든 대통령은 캐나다 국경과 붙어있는 미시간에서 생산하는 화이자 백신을 전 국민이 다 맞을 때까지는 캐나다에 일절 수출하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그 와중에 플로리다 주지사는 공화당원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만 우선적으로 백신 접종소를 설치해 물의를 빚었다. 캐나다가 백신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1980년대 멀로니 총리의 보수당 정부가 국영 제약회사인 코너트 랩을 민영화해서 프랑스 회사에 매각한 데서 출발한다. 공장은 아직도 퀘벡주에 있지만 무슨 백신을 생산해서 누구에게 팔지 캐나다 정부는 관여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아스트라제네카의 최대 생산기지이자 전 세계 백신의 60%를 생산하는 인도는 백신 국제정치의 강자로 떠올랐는데, 그 배경에는 50년 이상 의약산업을 전략적으로 지원해온 정부의 역할이 있다. 1억명에 가까운 인구가 방역에 취약한 빈곤 슬럼에 살고, 지금도 미국 다음으로 많은 확진자를 배출하고 있는 인도가 동시에 백신 국제정치의 강자가 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야당의 모 의원은 대통령이 아스트라제네카 1호 접종을 받으라고 요구하고, 여당의 모 의원은 대통령이 실험대상이냐며 발끈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백신 외교나 과학기반 정책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한국판 백신 정치의 사소함에 맥이 빠진다. 차라리 방역에 성공해놓고 백신에서는 평균성적밖에 내지 못하는 과학정책의 부재나 외교역량의 부족을 따지고, 그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인도만큼의 국가전략이라도 세우겠다고 답하는 모습이 필요한 때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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