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고향에 내려갔다가 은행에서 우연히 동창을 만났다. 동창은 은행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중학교 동창이니 마지막으로 본 지 20년도 더 된 셈이다. 한눈에 동창을 알아본 건 아니었다. 그것은 동창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이 특이해서 어, 했는데 얼굴을 보니 너더라.” 동창은 내 얼굴을, 나는 동창 얼굴을 보고 그때를 적극적으로 떠올렸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잖아.” 동창의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때가 소환되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 어떤 부분은 동창이 더욱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어릴 때 먹던 소시지가 더 맛있지 않아?” 저녁을 먹다가 형이 불쑥 물었다. 소시지를 문 채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출시되는 소시지가 더 맛있어야 할 텐데 이상해.” 우리 둘 다 길쭉한 분홍색 소시지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슈퍼에 갔는데 분홍색 소시지가 없는 거야. 당황했지.” 30년 전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마치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했다. “그때여서 더 맛있었던 것 같아. 맛을 가늠하는 데 상황도 영향을 끼치니까.”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열던 내 모습이 그려졌다. 웃고 있었다.

요새 ‘라떼는 말이야’라는 이름으로 무수한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있다. 여기서 라떼는 다름 아닌 ‘나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한때가 있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만이 한때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른의 권위에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훈수에 응대하는 것이다. 어른이 시시로 불러내는 ‘왕년’이 지금의 ‘라떼’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어릴 때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불러내는 것이 참 좋았다. 자꾸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때는 잊히게 마련이다. 끄집어내기를 그만두면 기억은 희미해진다.

독일의 영화감독 빔 벤더스가 찍고 쓴 사진 에세이 <한번은,>(이봄, 2015)에는 무수한 ‘한 번’이 등장한다. 빔 벤더스는 길 위에서 무수한 흔적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사진에 있어서 한 번이란, 정말로 오직 단 한 번을 의미한다”라는 문장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한번’이라고 붙여 쓰면 “지난 어느 때나 기회”를 의미하지만 ‘한 번’이라고 띄어 쓰면 횟수가 중요해진다. 그때가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때를 지금으로 불러낼 때마다 한번은 비로소 ‘한 번’이 된다. 희미해질 수도 있는 순간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삶은 이렇듯 한번 살아보는 것이 아니다. 딱 한 번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 누군가 내게 “글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우물쭈물하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분을 비롯해 글쓰기로 고민하는 분들에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저 ‘한번’에는 내가 여태 잊지 않은 공간, 심신에 새겨진 시간, 그 안에서 몸소 겪은 일이 다 들어 있다. 글을 써보면 알게 된다. 무수히 많은 일들 중 하나였던 ‘이런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든 특별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보고 듣고 겪고 느낀 일이 나의 일상을, 나아가 나의 인생을 구성한다. 개중에 어떤 것은 추억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를 호명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점점 희미해진다. 무수한 ‘한번’을 소환할 때 나는 좀 더 나다워진다. 이때 글쓰기는 나를 지키려는 안간힘이자 마침내 나를 지켜내는 작은 기적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이미 쓰고 있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재수할 때 독서실에서 백지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여년이 흐른 지금, 그 일은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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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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