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뜨면 경제정책이 논란거리지만, 길게 보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성장률은 25년째 하락 중이다. 그사이에 정권교체도 여러 번 있었고, 경제정책도 수없이 바뀌었다. 그래도 백약이 무효로 25년째 하락 중이다. 그러니 경제정책 가지고 논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 경제가 어렵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지금 정도의 논쟁으로는 답이 안 나올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는 운 좋게도 제조업 시대의 성장모델에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머리카락이 쭈뼛해진다. 제1, 제2 금융권과 국민투자기금 등 국내의 가용한 자금이란 자금은 죄다 끌어다 썼고, 대일청구권 자금과 베트남전쟁 참전을 통해 얻은 자원은 물론 불과 몇 년 사이에 세계 최고 수준의 외채 대국이 되었다. 실패하면 온 나라가 쪽박을 찰 수밖에 없는 일대 도박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성공할 가능성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도박에 ‘올인’했는데, 기적적으로 그 판을 휩쓸어버린 것이다. 그 기적을 뒷받침한 정치사회적 기반은 유신이라는 암흑이었다. 아예 반론이 나올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놓고 도박을 벌인 셈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1987년 이후 유신이라는 암흑은 제거되었지만 그 대가는 성장을 뒷받침할 정치사회적 기반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반론이 나올 수 없는 정치는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세상이 되었으니 합의가 있어야 한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은 사회적 연대를 강화해나갈 절호의 기회를 가졌지만 불행히도 임금인상 투쟁에 매몰되었고, 1997년의 경험과 그 후의 정치상황은 그들을 비타협의 좁은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장기적 성장동력은 꺼져감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성장률은 아직도 높은 편이니 정부와 정치권은 근본적 합의를 만들기보다는 정책에 대한 불신만 번갈아 부추기며 정권 싸움에 몰두해왔다. 그렇게 40년이 지났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온 국민이 새로운 성장의 기반을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제조업 시대 성공의 열매를 나눠 먹는 지대추구만 해온 세월이다. 모두가 공범이다.

최근 모빌리티산업을 둘러싸고 펼쳐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과 그러거나 말거나 벌어지는 정치권의 무의미한 소동 퍼레이드를 지켜보면서 착잡할 따름이다. 택시산업이 지금까지처럼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카카오 카풀과 타다가 퇴출되면 택시는 무사할 수 있을까? 우버는? 리프트는? 이지 택시는? 커브는? 디디는? 마치 한국만 스마트폰 안 쓴다는 얘기처럼 말도 안되지만, 이들 모두가 한국 시장에는 얼씬도 못하게 만든다고 치자. 그럼 자율주행 자동차는? 택시업계를 위해 자율주행 기술을 연구하지 못하게 해야 하나? 다른 한편으로 택시기사들의 힘든 현실을 외면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새로운 기술의 영역에서 산업구조 변화가 연착륙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기반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정치가 할 일이다. 지난 40년간 우려먹은 제조업 부문의 성공은 이제 제로성장을 바라보는 지경에 와있다. 누누이 강조하거니와, 4차 산업혁명은 사회혁신 프로그램이다. 일자리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의 일자리를 업그레이드하는 기술로 사용할 것인지를 디자인하는 것이 대규모 기술변동의 시기를 맞아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정책을 만들기에 따라서는 택시도 얼마든지 새로운 모빌리티산업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도 있다. 소비자가 택시를 가장 신뢰할 수 있도록 안전점검을 강화하고, 택시만의 앱을 만들어 카풀보다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공공데이터를 제공하고, 개별 소비자의 동선에 맞추어 대중교통과 택시를 연계하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신규 사업자의 진입 덕분에 모빌리티산업의 시장규모는 더 커지고, 택시기사들은 더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더 많은 승객을 태우고, 승객은 경쟁의 효율을 누리며, 관련 산업은 발전하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막상 현실은 정반대다. 정치인들은 지역구 이해관계에 따라 관련 법안에 의견을 달리하고, 그나마 간신히 면피만 해놓은 채 국민들이 호응하지도 않는 집회를 이어간다며 가는 곳마다 소동을 벌인다. 여의도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합의의 정치라고 많은 이들이 지적한다. 경제성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도 합의이다. 새로운 기술의 영역에서만이라도 장기적 설계를 하고, 누가 무엇을 부담하고 무엇을 양보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실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합의해야 한다. 초당파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치적 이해득실 때문에 오늘의 합의는 못한다 치더라도, 합의의 미래조차 만들지 못한다면 그들은 왜 존재하는가.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 비평 > 장덕진의 정치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은 왜 등을 보였나  (0) 2019.07.16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교훈  (0) 2019.06.18
합의의 미래는 있는가  (0) 2019.05.21
정체성 폐쇄의 정치  (0) 2019.04.23
결손민주주의와 장기 386  (0) 2019.03.26
공화국의 배신자들  (0) 2019.02.2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