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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머니의 안온한 배안에서 꼼지락꼼지락할 때, 어머니의 배가 수박만 하게 부풀어 올랐다. 날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더웠다. 하지만 그러고도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며 우주를 유영하듯 헤엄치고 자맥질하면서 혼자 놀았다. 보다 못한 부친이 어느 날 ‘이따만한’ 수박 한 덩어리를 사 가지고 오셨다. 리어카에 굴러다니는 수박으로 어머니의 배에 박힌 수박을 빼내기로 한 전법이 통했을까. 신통하게도 그 다음날 새벽 나는 시원하게 세상맛을 구경했다고 한다. 그런대로 더위를 꿋꿋하게 버티고 과일 중에서도 특히 수박을 좋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한 일이 있고난 이후 오십구 년이 지난 오늘 아침의 일이다. 부엌에서 미역국이 설설 끓는 동안 무심코 바깥을 보니 매미 한 마리가 방충망에 납작하게 붙어 있다. 나보다 한참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지척에서 울어대는 매미를 지우개 보듯 슬쩍 보고는 화장실로 들어가고 나는 급히 카메라를 찾아 몇 방을 찍으며 오래 매미를 바라보았다. 혹 매미나라에서 생일축하 사절이라도 보낸 건 아닐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이르던 순간, 매미는 뚝 노래를 멈추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휙 날아갔다.

찜통더위에 입맛도 없어졌다. 수박으로 가볍게 마무리한 뒤, 매미가 훌쩍 공중으로 떠나듯 나는 산으로 떠났다. 경기도 어느 야산으로 해오라비난초를 찾으러 가는 길.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아주 보기 힘든 난초이다. 비가 한바탕 내릴 것 같더니 더위에 눌려 이내 맥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몇 발짝 움직이지 않았는데 등줄기에 도랑처럼 땀에 후드득 흘러내린다. 드디어 만났다. 야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아주 귀한 꽃, 해오라비난초.

이 꽃은 한번 보면 빨려든다. 왜 이런 이름을 가졌는지, 지금 무슨 자세를 취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사방의 공중에서 요란히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응원 삼아 이 첩첩산중의 골짜기를 도움닫기로 하여 제 세상을 떠메고 어디로 가려는가, 해오라비난초여. 비상한 모습과 날렵한 동작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황홀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해오라비난초,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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