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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향기 없는 화단

경향 신문 2020. 10. 29. 11:08

가끔 어떤 사물을 보면 오래된 기억이 떠올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나는 길가 화단에 핀 꽃들을 보면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내 담임은 덩치가 크고, 손이 투박하고 목소리가 두꺼운 중년의 자연 과목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담임과 연못 옆 작은 화단에서 꽃과 식물들을 키웠다. 팬지, 베고니아, 피튜니아, 채송화, 마리골드. 그때 깨우친 이 꽃들의 이름은 어른이 되어 남들 앞에서 아는 척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샐비어였다. 선명한 붉은색 꽃잎이 열매처럼 탐스럽게 피어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주는데, 잎을 똑 뜯어서 입으로 빨면 새콤한 꿀까지 나왔다.

화단을 청소하다 잎을 따서 꿀을 빨아 먹는 일은 아이들만의 즐거움이었지만 민철이가 꽃잎을 땄다는 이유로 담임에게 “어미도 없는 놈이!”라는 말을 듣고, 몇 차례나 뺨을 걷어 올려진 후부터는 누구도 그 화단에 있는 꽃을 만지려 하지 않았다. 우리 반 학생들은 모두 민철이의 집안 사정을 알았다. 숙제를 해오지 않았을 때, 청소를 잘하지 않았을 때,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때. 담임은 항상 민철이네 형편을 입에 올리며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민철이를 봤다. 하얀 새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그날은 민철이가 실내화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아침부터 담임에게 뺨을 맞은 날이었다.

‘팔자’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 건 그 사건을 고발하고 나서였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나는 민철이를 때리던 그 선생을 장학사로 다시 만났다. 교실 뒤편에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나가는 옆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가슴이 뛰었다. 종례가 끝나고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민철이의 이름과 ‘신고’, ‘아동학대’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했다. 선생님은 내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나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걔도 참 팔자가 딱하다.” 어떤 조치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한숨과 함께 나온 무력한 말에 가슴이 더 갑갑해졌다. ‘팔자’라니. 그건 부당함에 맞서지 말라는 언어적 탄압이었다.

대학생 땐 어떤 강사의 상습적인 성희롱을 고발했다. 그런데 그는 계속 학교에 나와 수업을 했다. 여학생들이 다시 징계를 요구했을 때, 학생회의 한 간부가 말했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라’고. 왜였을까? 나는 그때 그 말이 무서웠다. 마치 ‘그게 네 팔자니, 포기하라’는 선고처럼 들렸다. 설사 무언가 부당하더라도 이미 사회 구성원 다수가 결정한 사항이니 뒤집으려면 세력을 만들어 모두를 설득하라고. 그것이 이 사회의 룰이고, 정치가 가진 합리적인 해결 방안이라고.

임신 중단(낙태)에 대한 합법적인 진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세상에 사는 나는, 임신 14주 이내에만 임신 중단 수술이 가능하다는 굴욕적인 판결 앞에서 다시 ‘팔자’와 ‘정치’라는 돌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내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 이 천부적이고 자연스러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왜 나는 ‘그게 내 팔자’라며 수긍하거나 ‘정치적 투쟁’을 해야 하는가? 왜 나는 ‘착한 낙태’와 ‘나쁜 낙태’를 가르는 도덕적 잣대와 ‘낙태 남용’이라는 단어를 들으며 인간적인 수치심을 견뎌야 하는가?

이제 나는 ‘팔자’ ‘운명’을 들먹이는 사람만큼이나 누군가의 절박한 호소에 ‘정치로 해결하라’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팔자’는 상대를 외면하는 기술이고, 그들이 말하는 ‘정치적 투쟁 강요’는 ‘어차피 이기지 못할 싸움’이란 빈정거림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의 처절함에 눈을 감지 않는 용기만이 ‘팔자’를 운운하는 어설픈 위로나 사기에 가까운 회유가 아닌, 연대와 희망이 있는 정확한 목적지에 나를 데려다줄 거라 믿는다. 그곳에 핀 화단에서는 무력하고 슬픈 향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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