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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1 대 99에 대한 단상

경향 신문 2016. 7. 20. 11:24

영국 여행 중에 리버풀에 들렀다. 과연 비틀스의 도시였다. 비틀스 거리와 존 레넌 길, 초창기 비틀스가 공연했던 캐번 펍과 곳곳의 비틀스숍, 비틀스 투어가 따로 있을 만큼 리버풀은 비틀스의 화려한 스토리텔링과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리버풀에 비틀스와 리버풀FC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도 생소한 ‘국제노예박물관’이 있다. 비틀스의 현란한 리듬에 어지간히 취해 있던 감각을, 강풍처럼 단숨에 후려치는 공간이다.

한 입시업체 주최로 7월 10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2017학년도 수능 대비 설명회’에서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여름방학 학습법에 대한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강윤중 기자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금지법을 공포한 지 200년을 맞아 2007년에 건립한 박물관이라고 한다. 1500년대부터 180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아메리카, 서아프리카가 어떻게 삼각형의 무역루트를 개발해 흑인을 노예로 ‘포획’하고 운반해서 팔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자랑스럽지 않은, 애써 발굴하거나 전시하고 싶지 않은 수치의 역사인 만큼 전시실은 화려한 대영박물관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고 초라했지만 비틀스의 흥취와 달리 관광객을 숙연케 하는 박물관이었다.

첫 번째로 마주한 벽의 “나는 평화로운 노예보다 위험한 자유를 원한다”는 문구는 다소 심상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흑인들이 몇 개월의 항해 동안 배 선창 아래 물건처럼 묶여 그대로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했던 모습,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아 손발이 잘린 노예의 사진, 주인 가족들의 주위에 서 있는 흑인 노예들이 자신의 검은 배에 ‘1925 Merry Christmas’를 한 글자씩 달고 트리처럼 서 있는 전시자료를 보고나면 추상적으로 알고 있던 ‘노예’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비참함을 뜻하는지 알게 되고 그러면 저 심상한 문구를 다시 읽게 된다.

‘노예’란, 단순한 노역과 궁핍이 아니라 ‘모욕과 수치’의 경험이자 인간 존엄이 박탈되는 경험, 즉 한낱 크리스마스 장신구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 이러한 노예무역으로 작은 항구도시였던 리버풀은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 되었고, 이후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의 다른 벽면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노예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전보다 더 강화되고 다양화된 형태로.” 노예란 것이 단순히 소유관계의 제도가 아닌, ‘육체적·정신적인 강제와 노역, 모욕’과 관련된 것이라면 현대에도 여전히 그것은, 그리고 신분제 또한 잔존한다고 볼 수 있다. 숱한 갑을관계 속에, 구의역 사고와 같은 소외된 노동 속에, “99%의 민중은 개·돼지” 또는 “종놈”이라는 의식 속에. 그 속에서 어떤 이는 돈을 받고 짐승처럼 맞기도 하고, 어떤 이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신분의 세습 또한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통치자, 재벌과 고위공직자들의 음서제는 말할 것도 없고 대를 이은 숱한 연예인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민주주의 실현 이후 만인평등 이념에 기반해 기회균등을 누리는 듯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최근 20년 동안 더욱 확대된 지방과 수도권의 차이, 강남과 강북의 차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 그리고 양극화 등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신분 이동의 길목에는 ‘교육’이라는 바늘귀만 한 구멍이 놓여 있다.

소설가 정아은의 <잠실동 사람들>을 보면 ‘강남’으로 상징되는 상류층에 편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대치동 학원가에서 새벽 라이드로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어떤 ‘노예’적 인격체로 훈련받는지를 알 수 있다.얼마 전 중학생 조카의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다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수학 문제가 쓸데없이 어렵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문제가 어려워야 하느냐고 지인에게 물었더니, 그래야 강남 학원 교육을 받은 자와 안 받은 자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야 학원비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 학원비를 통해 특목고, 인서울이 보장되고, 그래야 아이들의 이후 계급이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바늘귀만 한 입시전쟁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파문을 보면 왜 우리 교육이 신분제를 공고화하는 데 일조해왔는지, 어떤 정책 기반과 인식이 작동해왔는지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입시 지옥 속에 아이들을 이상한 노예로 만드는 파행적 교육을 중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물어볼 것도 없이 손쉬운 해결방법은 현대적 신분제를 해체하는 것이다. 거창하게 신분제를 생각할 것도 없이 1:99라는 부의 분배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자 상·하위 10%의 임금격차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보다 심한 나라는 미국, 이스라엘뿐이다. 이러한 소득불평등을 줄이는 것, 최저임금을 최고임금과 더불어 생각하는 것, 그것이 1:99의 세계를 바꾸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이 되지 않을까. 또한 1:99를 지배와 피지배의 분할이 아니라 99를 대변하는 1로 바꾸는 실천이지 않을까.

정은경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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