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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페이지가 출연한 영화 <주노>(2007)의 한 장면.

오랫동안 엘리엇 페이지(개명 전 엘렌 페이지)는 나에게 ‘주노’로 기억됐다. 열 여섯 살에 흥미삼아 친구 블리커와 섹스를 하고 그 결과 임신을 하게 된 고등학생 소녀. 한국이라면 인생이 끝장날 것 같은 상황이지만 영화 <주노>의 전개는 그렇지 않다.

임신테스트를 위해 2.3ℓ의 오렌지 주스통을 손에 들고 끊임없이 들이키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영화에서 주노는 임신을 확인한 후 임신중단을 결심한다. 임신중단을 위해 여성센터를 방문하지만, 그곳에서 임신중단에 반대하는 친구로부터 “아기에게도 손톱이 있다“는 말을 듣고 포기한다. 주노는 아이를 낳은 뒤 양부모에게 입양하기로 결정한다.

주노는 용기를 내 부모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는데, 여기서도 예상밖의 전개가 펼쳐진다. 부모는 혼절하거나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대신 담담하게 딸의 임신 사실을 받아들이고, 아이를 낳겠다는 선택을 존중한다. 주노는 임신했다는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지도 않는다. 만삭의 배로 학교를 다닌다. 힘겹게 출산을 한 주노에게 아빠는 따스하게 위로를 건낸다. “언젠가는 여기 다시 오게 될 거다.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양부모에게 아이를 넘겨준 주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처음처럼 담담하게.

주목할 점은 모든 결정이 주노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쑥맥인 블리커에게 성관계를 해보자고 제안을 한 것도 주노였다. ‘원치 않는 임신’에 대처하는 방식도 오롯이 주노의 선택이었다. 임신중단이 불법이 아니었기에 임신중단을 위해 여성센터를 찾아갈 수 있었고, ‘손톱’이 마음에 걸려 임신중단을 포기하고 입양을 결심한 것도 주노다.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만한 양부모도 직접 골랐다.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해 주노는 ‘원하는 방식’으로 선택하고 결정했다.

물론 영화에서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청소년들에 대한 성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질적 정보를 제공하는 성교육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주노가 원치않는 임신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영화 <주노>의 한 장면.

한국에서 주노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비관적이다. 안전하게 임신중단할 곳을 찾는 것도, 임신한 채로 학업을 이어가는 것도,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기도 어려울 것이다. (2021년엔 낙태죄가 폐지되어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다.) 주노는 10대에 임신을 해도 일상을 누리고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 사회 제도와 가족의 지원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려면, 이정도 선택이 가능한 사회적 환경을 갖춘 다음에 말해야 할 것이다.

임신한 10대를 그저 ‘주노’ 자체로 바라볼 수 있게 했던 엘리엇 페이지는 지금 또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달 1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이 트렌스젠더임을 커밍아웃하며 자신이 이름이 이제 더이상 엘렌이 아니라 엘리엇이라고 밝힌 것이다. 페이지는 이미 2014년 한 인권 캠페인 컨퍼런스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2018년 동성 배우자와 결혼했다. 그는 처음 커밍아웃 당시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오로지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로 괴롭힘당하고 고통받는다. 너무 많은 자퇴와 학대와 가출과 자살이 발생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의 ‘자신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트렌스젠더이며, 자신을 ‘그(he/they)’로 불러줄 것을 부탁했다. 할리우드의 성공한 ‘여배우’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유명인으로서 자기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며 트렌스젠더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비판하며 성소수자 인권을 옹호했다.

임신한 열여섯 소녀도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이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 <주노>처럼, 페이지가 트렌스젠더인 자기 자신 그대로 배우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이어가길 바란다. 그것도 성공적으로.

모바일팀 이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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