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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2부-(5) 노동 없는 사회 Ⅱ…왜 민주주의가 아닌가

박상훈|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민주화 20년의 비극, 노동 존엄성 훼손

 


경찰들이 서울 상암동 홈에버에서 해고에 맞서 농성하는 비정규직을 끌어내고 있다. 자본의 요구에 따라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것이 공권력의 임무가 되어 있는 나라에서 노동의 존엄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신자유주의가 낳은 부정적 영향 가운데 하나는 일에 대한 헌신이 갖는 가치 내지는 노동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데 있다. 노동 유연성이라는 부드러운 말이 실제로 가져온 것은 비정규직 양산과 실업 증가였다. 그로 인한 고용 불안과 빈곤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노동비용의 축소를 가능하게 해주는 정상적 시장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렇듯 상당수의 노동자가 열심히 일할 기회도 갖지 못하는 잉여 인간이 되면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대신에 ‘일하는 것이 특권이자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새로운 노동 윤리가 만들어졌다. 이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경제 독트린은 지금까지 없었다.

이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외적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태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그간의 민주정부들이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제어,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추진자로서 역할을 했다는 데 있다. 민주 정부의 이름으로 실천된 신자유주의, 이것이야말로 민주화 20년의 비극적 결산이 아닐 수 없다.

보통 시민을 위해 만들어진 민주주의

우리는 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가? 민주주의 자체의 그 어떤 숭고한 뜻이나 이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그러한 접근이 위험할 때도 있는데, 이념이나 가치가 과도하게 강조되고 맹목의 신화가 되면 현실의 실제 문제를 못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창연합’이니 ‘반이명박연합’이니 하는 식으로 구호화된 ‘민주주의 수호론’이 별 영향력을 갖지 못한 채 많은 시민들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런 접근을 통해 과도하게 물신화되고 의인화된 민주주의가 다수의 보통사람들이 직면해 있는 삶의 구체적 현실을 생기 없는 모조품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평생 민주정치를 연구했던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가 옹호될 수 있는 이유를 어떤 이념성이 아니라, “사회 하층의 요구와 경험을 이해하고 통합하는 일을 다른 어떤 통치체제보다도 잘 할 수 있다는 데”서 찾았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문구, 즉 “민주주의는 보통의 시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민주주의의 위대함은 “평범한 사람들을 모아 비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데 있다고 말했고, 일의 가치 혹은 노동의 존엄성을 희생해서 경제성장을 추구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노조가 강할수록 불평등 작고 빈곤율 낮아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될 때, 보통의 평범한 시민들을 위한 정치체제가 될 수 있을까?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계층 간 평등의 정도가 큰 나라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강력한 설명의 하나는 기업운영-노사관계-정당체제-정책결정 과정에서 노동의 시민권이 얼마나 폭넓게 보장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노동과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여러 학자들이 강조하듯, 노동자들의 이익과 열정을 대변하는 노조와 정당의 힘이 강한 나라일수록 계층 간 불평등 정도는 작고 빈곤율도 낮다. 투표율은 어떨까? 노동의 정치적 대표성이 클수록 높다. 범죄율도 낮고 사회적 약자 집단에 대한 보호의 수준도 높다.

시장경쟁에 내몰리는 정도도 낮고 규제 없는 금융개방에 대한 방호벽은 높으며 그 결과 경제체제도 안정적이다. 하지만 노사 분규가 증가하고 급진적 노동운동이 출현할 가능성은 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서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볼 수 있듯, 노동의 권리가 폭넓게 인정될수록 전체적으로 높은 수준의 산업평화가 유지된다.

미국의 정치학회와 사회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립셋은 노동의 참여가 확대될수록 노동운동의 탈급진화 경향이 커지는 것을 하나의 법칙적 사회현상으로 정의한 바 있다. 요컨대 노동의 시민권에 폭넓은 기초를 둘 때에만 민주주의는 인간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계층간 불평등 원리에 기초

잘 알다시피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고 하는 생산체제 위에 서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역사상 그 어떤 생산체제보다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계층 간 불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둔 것이자 인간 사회의 공동체적 통합을 위협하는 부정적 효과를 동반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상적인 정치를 구상하고 조화로운 이성적 공동체를 꿈꾼다 하더라도, 현실의 불평등한 계층 질서와 갈등 관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빼고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허구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으로, 그 수에 있어서나 조직적 잠재력에 있어서 그에 견줄 만한 세력은 없다.

따라서 이들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따라 그 나라 민주주의 내용과 질은 크게 달라진다. 노동을 축소해야 할 생산 비용으로 간주하고 참여로부터 배제하려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노동만 배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사회 전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 노동을 배제하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온전할 수도 없다.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을 빨갱이나 좌경으로 몰아가는 비이성적 억압의 논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한 논리는 노동으로 먹고사는 사람을 멸시하고 천대하면서 못 사는 사람을 멀리하는 심리를 만들어내며, 이런 환경에서는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윤리적인 토양이 척박해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위해 노동자 대변 정치세력 필요

가끔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느냐’를 따져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민주주의가 밥 먹여줄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경제적 분배효과가 계층별로 달라질 때, 민주주의는 안정된다.

그 경우 어느 사회집단이든 정치참여의 욕구가 자신들의 필요로부터 발생하며, 결과적으로 개인과 민주주의 사이의 결합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노동 정당이 없는 미국조차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와 공화당이 집권했을 때 계층별 소득분배는 뚜렷하게 다르다.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에 인용해 잘 알려진 프린스턴 대학 래리 바텔스 교수의 책 <불평등한 민주주의>에 따르면 1947년에서 2005년 사이 미국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가난한 노동자의 소득 증가율은 공화당 집권기에 비해 민주당 집권기에 6배나 더 높았음을 볼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아직까지 이런 함수관계를 만들지 못했다는 데 있다. 기대했던 김대중, 노무현정부 하에서 비정규직은 최대로 늘었고 소득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으며 사회 하층의 빈곤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남북한 사이의 평화관계를 구축하고 여러 개혁조치를 취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평범한 보통사람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중요하다.

노동 없는 정치는 절망을 낳을 뿐

지난 총선에서 투표를 거부한 54%의 유권자들, 그리고 전체 노동자의 54%에 해당하는 850만 비정규직의 눈으로 볼 때, 정치를 누가 하든 자신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참여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는 주범은 다른 것이 아닌, 노동 배제적이고 하층 배제적인 사회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노동 없는 정치가 가난한 보통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데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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