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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진중권의 돌직구

K방역의 국뽕

경향 신문 2020. 6. 29. 11:10

한국의 방역은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진단키트의 선제적 개발, 보안카메라나 스마트폰을 이용한 철저한 추적 및 격리 시스템, 드라이브 스루와 같은 대량검사 체제, 정부와 지자체의 투명한 정보공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등 시민사회의 적극적 협조 등. 이 모두가 지난 메르스 방역 실패에서 얻은 아픈 교훈 덕분일 것이다.

애초에 중국의 방역은 서구의 모델이 될 수 없었다. 서구는 중국의 공산주의적 방식보다는 한국의 자유주의적 방식을 선호했다. 각국 정상이 한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와 방역의 노하우를 물었다.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은 드높아졌다. 모범으로 알았던 서구의 나라들이 거꾸로 한국에서 배워간다는 사실에 한국인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는 세계를 정복한 듯한 들뜬 분위기에 휩싸였다. 게다가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난 사재기 소동, 인종혐오 폭력 등은 서구 역시 ‘별것 아니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서구중심주의 시각을 교정해줬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분위기에 취해 K방역 국뽕이 상당 부분 착시에 기반한 것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애초에 한국의 성공을 서구와 비교한 것이 문제다. K방역의 성과는 조건이 유사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비교 속에서 평가됐어야 한다. 일례로 일찍이 코로나19 방역의 모범으로 꼽혔던 대만은 이미 코로나19 사태의 종식국면에 들어갔다. 비록 대만만큼은 아니라도 홍콩과 싱가포르 등도 코로나19 확산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통제한 편에 속한다.

인도차이나반도의 네 나라, 즉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태국도 지난 한 달 동안 국내에서 감염자가 안 나왔다. 분명히 우리보다 더 성공한 예라 할 수 있다. 인접한 말레이시아도 근래에는 국내 확진자 발생 건수가 10명대로 크게 줄었다. 하지만 이들 나라가 서구에 비해 방역이나 의료 시스템이 더 발달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세계적 실패사례로 꼽히는 일본도 확진자 수에서는 우리와 큰 차이가 없다. PCR 검사를 안 해서 적게 나온다고 하나, 사망자수도 인구의 규모를 고려하면 우리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의 한 교수는 이 이상한 성공의 원인을 ‘팩터 X’라 불렀다. 아시아 국가들의 성공에는 뭔가 우리가 모르는 요인이 따로 있다는 얘기다.

강경화 외무장관은 K방역과 관련해 영국의 BBC, 독일의 DW와 인터뷰를 했다. 두 인터뷰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BBC 인터뷰에서 강 장관은 K방역의 승자였다. 반면 이태원클럽 관련 집단감염 사태 이후에 가진 DW 인터뷰에서는 K방역이 “민주적 가치”와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공격적 질문을 받았다. 성소수자들이 감염 자체보다 아우팅당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한국의 “분위기”도 지적을 받았다.  

한국의 방역 태세를 칭찬하는 슈피겔지의 기사에도 ‘한국의 추적 시스템은 개인정보보호법이 있는 유럽에는 도입될 수 없는 것’이라는 논평이 들어 있었다. 서구에서는 사생활을 생명만큼이나 중시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비상시에는 개인의 사생활을 희생해도 된다’는 데에 광범위한 사회적 동의가 존재한다. 이는 결국 가치관의 문제이지만, 적어도 K방역의 추적 시스템이 기술적 선진성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편 이웃 일본의 경우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확진자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주말에는 PCR검사를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우리에게는 이게 어처구니없는 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보면 성공적 방역의 바탕에는 우리 의료진과 공무원의 엄청난 초과노동이 깔려 있음을 의미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에는 초과노동을 너무나 당연시하며, 이를 “희생”과 “헌신”이라는 공치사로 때우고 넘어가려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다.

K방역은 자랑할 만하다. 하지만 ‘국뽕’은 사람들을 내셔널 나르시시즘에 빠뜨린다. 자기의 미모에 대한 평가는 원래 남이 내리는 것. 제 미모에 대한 자기 평가와 남의 평가가 턱없이 벌어질 때, 타인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뽕’은 고통을 잊게 해준다. 국뽕 역시 현실의 문제를 잊게 해준다. 하지만 뽕을 지속적으로 맞는다고 고통이 실제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국뽕은 늘 권력이 제공하는 ‘인민의 아편’이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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