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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9.19 [백승찬의 우회도로]출산과 국가

가까운 미래,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획책한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들은 국명을 ‘길리어드’라 바꾸고, 신정주의·전체주의·가부장제에 기반해 나라를 운영한다.

이곳에선 책이 사라진다. 화장품, 대중영화, 개성 있는 의상같이 쾌락을 주는 물건들도 찾을 수 없다. 공개처형이 부활해 가톨릭, 퀘이커 등 ‘이교도’의 시신이 거리에 내걸린다. 인간은 오직 신의 뜻, 혹은 신의 뜻이라고 가장된 국가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 길리어드에서 특히 영향받은 건 여성들의 삶이다. 길리어드는 주변국들과의 오랜 전쟁, 환경 오염 등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 길리어드에는 소수의 남성 ‘사령관’과 그들의 아내가 있다. 아내는 대부분 불임이기에, 조금이라도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은 사령관의 집에 ‘시녀’로 배속된다. 시녀는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을 잊은 채 ‘오브프레드’(‘프레드’의), ‘오브글렌’(‘글렌’의)처럼 사령관의 성(姓)을 이름으로 받고, 사령관의 아이를 임신할 의무를 지닌다. 물론 이 섹스엔 조금의 쾌락도 개입되어선 안된다. 사령관과 시녀의 섹스는 지금껏 그 어느 소설이나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기괴하다. 아내가 침대 머리맡에 사지를 벌린 채 자리하면 시녀는 그 다리 사이에 눕는다. 아내는 시녀의 두 손을 잡아, 두 여자가 하나임을 보여준다. 두 여자 모두 옷을 차려입었고, 시녀는 속옷만 벗은 상태다. 사령관은 시녀의 하반신 쪽에 자리해 할 일을 한다. 세 번의 기간 내에 임신하지 못하면, 시녀는 다른 시녀로 대체된다.

오랫동안 서가에 꽂아두고 잊고 있던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1985년작 SF <시녀 이야기>를 마침내 읽은 건 하나의 단어, 하나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단어는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언급한 ‘출산주도성장’이다. 출산주도성장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대안으로, 아이를 낳으면 출산장려금 2000만원, 성년까지 1억원의 수당을 주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각종 복지 수당을 ‘포퓰리즘’이라며 반대하던 자유한국당이 입장을 바꿔 의아하고, ‘돈 주면 애 낳을 것’이라는 발상이 당황스럽다. 

이미지는 현실 세계에 나타난 ‘시녀’와 관련 있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시녀 이야기> 속 시녀의 의상을 입은 여성 시위대가 세계 곳곳에 출현했다. 이들은 텔레비전 속 시녀 의상 그대로, 빨간 외투에 하얀 두건을 썼다. ‘시녀 시위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 앞에 나타났고, 영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문을 반대했다. 아일랜드와 아르헨티나에선 낙태권 관련 시위에 등장했다. 시녀들은 때로 정치인과 법률가들이 자리 잡은 의회의 방청석에 나타나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소설 속에 묘사된 대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침묵했으나, 검은 양복의 남성들 사이에 채도 높은 빨간 의상만으로도 눈에 띄었다. 여성 문제, 특히 낙태 관련 이슈를 제기하는 데 있어서 ‘시녀 복장’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됐다. 

지난달 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텔레비전 시리즈 ‘시녀 이야기’ 속 ‘시녀’ 복장을 한 시위대가 낙태권에 찬성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소설 <시녀 이야기> 속 아이 낳을 수 있는 여성은 ‘다리 둘 달린 자궁’이자 ‘아기를 담는 그릇’ 취급을 받고, 아이 낳을 수 없는 여성들은 ‘비여성’이라 불린다. 가임 여성은 워낙 적어 귀하게 여겨지지만, 그들은 인간이기에 귀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귀하다. 여성의 출산 능력은 여성 개인의 행복이나 의지가 아니라, 국가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된다. 일찌감치 애트우드는 ‘애 낳아서 애국하자’는 주장이 횡행하는 디스토피아 사회를 상상하고 경고했다. 33년이 지나 들려온 ‘출산주도성장’이란 해괴한 어휘엔 <시녀 이야기> 풍의 끔찍한 세계관이 깔려 있다. 김성태 의원의 제안이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걱정에서 나온 것이라 애써 이해한다 하더라도, ‘출산주도성장’이란 발상에는 그 어떤 여성도 국가경쟁력이나 경제성장을 생각하며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는 당연한 상식이 빠져 있다.

가녀리고 존귀한 생명의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즐겁고 보람있다. 부모의 단점과 장점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이와 함께 한 삶을 보내는 것은 우주의 순환을 체험하는 것처럼 경이로운 일이다. 젊은 여성과 남성들이 이 기쁨을 포기하지 않도록,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라의 일이다. 냉소적으로 말해, 젊은이들이 생명체의 근본 목적인 출산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회의 존속가치가 청산가치보다 크다고 할 수 있나.

붉은 복장의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낙태권 찬성론자는 말했다. “아이는 그 자체로 선물이지만, 자유롭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이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건 온전히 부모의 선택과 기쁨을 출발선으로 삼아야 한다. 국가는 빠져달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달라.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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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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