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고위 공무원이며 현재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에 파견되어 있는 한민호 사무처장이 대한출판문화협회(이하 ‘출협’) 윤철호 회장을 명예훼손으로 형사고발하고 민사소송도 제기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지난 1월7일 윤철호 회장은 문체부가 작년 12월31일 발표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책임규명 이행계획이 불공정하고 불철저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윤태용 한국저작권보호원장과 한민호 사무처장의 실명을 거론했는데, 후자가 자신의 명예를 크게 훼손했다며 고소·고발을 한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16년 8월, 당시 한민호는 문체부 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SNS상의 댓글로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고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대한민국 지성사에 치명적인 해독을 끼친 책입니다. 반성하는 의미에서 상응하는 책을 ‘해당 출판사가’ 내야 하거늘” 운운하며 파장을 일으켰다. 자발적으로 블랙리스트를 실행하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의심이 든다. 더구나 출협 회장의 성명은 당시의 담당 과장은 수사의뢰를 하면서 그 상급자였던 한민호에 대해 아무 조치가 없는 명백한 모순을 지적했을 뿐이다.  

블랙리스트 사태의 경과를 잠깐 되돌아보자. 2017년 7월 문체부 산하 민관합동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공동위원장은 신학철 화백, 도종환 문체부 장관)가 출범하여 1년 가까이 활동한 후, 2018년 6월 권고안을 제출하여 관련 공무원과 산하기관 임직원 131명(수사의뢰 26명, 징계 105명)의 책임규명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문체부가 9월에 발표한 이행계획은 검토 대상 68명(수사의뢰 24명, 징계 44명) 중 수사의뢰 7명, 주의 조치 12명에 그쳤다. 

문화예술계는 사실상 징계가 전혀 없다며 크게 반발했다. 11월3일 문화예술인들은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9시간 이상 걸려 국회에서 청와대까지 항의 행진했으며, 11월8일 청와대 앞에서 이용선 시민사회수석을 만나 철저한 책임규명 대책수립을 요구했다. 이 수석은 문화예술계의 목소리를 대통령에게 가감없이 전달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지만, 12월31일 문체부는 관련 공무원과 산하기관 임직원 10명을 수사의뢰, 68명을 징계와 주의 조치(문체부 소속 징계대상자는 단 1명!)하는 최종 이행계획을 내놓고 장관과 간부들의 2차 대국민 사과로 마무리하려 들었다.

문화예술계의 의견을 반영했다고 내세우지만 이 최종 대책도 턱없이 부족하여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출협 회장의 성명에 민·형사상의 명예훼손을 걸어오다니 도대체 무슨 짓인가. 말문이 막힐 지경이지만, 두 가지만 강조한다.

첫째, 블랙리스트 관련 기소는 형법 123조 공무원의 직권 남용 및 권리행사 방해죄를 근거로 하지만, 이런 형사재판이 초유의 일이라 확립된 판례가 없어 이미 재판 중인 피고인들은 법의 틈새를 이용해 빠져나가려 발버둥치고 있다. 그러나 설령 관련 법률이 미비하더라도 검찰과 사법부는 우리 헌법의 정신과 함께 제22조 1항(“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등 관련 조항을 명심해야 한다. 블랙리스트에 대한 단호한 처벌은 헌법적 의무이다. 따라서 검찰은 문체부가 넘긴 수사대상자에 국한하지 말고 철저하고 광범위한 수사를 해야 한다. 사법부 또한 숱한 촛불들이 ‘이게 나라냐’고 외치며 헌법과 법률이 지켜지는 국가를 요구한 시대정신에 맞는 판례를 확립해야 한다.

둘째, 블랙리스트 관련자 처벌이야말로 정부 안의 수많은 양심적이고 유능한 공무원들을 살리는 길이다. 상급자의 지시를 어기기 어렵다는 핑계, 과거의 공로, 다른 사안과의 형평성 등을 명분으로 처벌을 흐지부지한다면, 블랙리스트에 저항하다 고초를 겪은 공직자는 물론이고 양심과 원칙을 지키려고 남몰래 애쓰며 고통을 당한 더 많은 이들은 대체 뭐가 되는가. 엄정한 처벌만이 나라 운영의 중추인 공무원 사회를 구한다.

끝으로 더불어민주당과 이해찬 대표에게 호소한다.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말바꾸기와 꼼수에 매달리지 말고 하루속히 자유한국당 아닌 야당들과 흔쾌히 합의해야 한다. 당신들이 기득권에 눈멀어 머뭇거리는 와중에 적폐 관료마저 털끝만 한 반성 없이 적반하장의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감히 5·18을 폄훼하는 배짱은 또 어디서 나오겠는가. 내년 4월 총선에서 집권당의 승리와 함께 촛불혁명의 진전을 위한 발판을 놓을 시한, 즉 선거법 개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려야 할 시한이 불과 보름도 남지 않았다. 집권당이 주저하면 대통령이라도 직접 나서야 한다. ‘촛불정부’는 국민의 뜻을 외면한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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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직무대행인 송수근 제1차관과 문체부 간부들이 어제 정부세종청사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대해 대국민사과를 했다. 김종덕 전 장관과 김종 전 차관에 이어 조윤선 장관까지 줄줄이 구속되자 부처 차원에서 참회하고 자성의 뜻을 밝힌 것이다. 송 차관은 성명에서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보루가 돼야 할 문체부가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해 참담하고 부끄럽다”면서 “통절하게 반성하고 있으며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말했다. 특별검사가 진실을 밝히는 일에 적극 협조하고 책임도 감내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문체부의 참회를 보는 시민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문체부를 비선 실세 최순실씨를 챙기는 도구로 마음껏 주물렀다. 자질이 없는 사람들을 장차관으로 기용해 사기업도 못할 일을 서슴없이 시켰다. 문체부는 정상적인 국가 조직이 아니었다. 유진룡 전 장관이 두 차례 박 대통령에게 블랙리스트의 부당성을 제기했다고 하지만 공허한 저항에 그쳤다. 오히려 정유라씨의 승마 대표선수 선발이나 1급 공직자 집단 사직 강요 논란이 보도됐을 때 문체부는 의혹을 부인했다. 미르·K스포츠 재단 편법 설립도 문체부 간부와 직원들이 충실히 해냈다. 법령과 절차에 따라야 할 관료조직이 스스로 규범을 어긴 것이다. 강요당했다고 피해자로 자처할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이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3일 서울 대치동 박영수 특검 사무실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하며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집행에 대해 작심한 듯 비판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유 전 장관은 어제 블랙리스트 작성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주도했으며, “헌법 정신을 훼손한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 김 전 비서실장은 지금까지 리스트 작성 지시를 부인하고 있다. 박 대통령 측은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사실이 없다”며 이를 보도한 언론을 제소했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운영은) 문화부 장관이 할 수 있는 일로,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명한 사람들은 나몰라라 하는데 문체부는 분명히 지시를 받았다며 사죄하는 희극이 연출되고 있다. 그러면 황교안 권한대행이 나서서 사과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황 대행은 신년기자회견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문체부를 대표해 사죄한 차관은 언제 블랙리스트 사건 피의자가 될지 모르는 처지다. 1만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을 블랙리스트에 묶어 탄압한 국제사회의 수치를 수습하는 정부의 자세가 아니다.

이번 사건은 공무원들이 권력자의 불법적 지시에 복종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상부의 지시를 영혼 없이 따르기만 하다 사후에 참회하라고 공직을 맡긴 게 아니다. 공직사회 전체가 단단히 교훈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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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직무대행(56·제2차관)이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실·국장 이상 간부들 명의로 “(블랙리스트로) 국민들에게 큰 고통과 실망, 좌절을 안겼다”며 사과문을 발표하고 머리를 숙였다. 문체부는 사과문에서 “공공지원에서 배제되는 예술인 명단으로 문화예술 지원의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해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또 “특검 수사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질 것”이라며 “부당한 개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체부의 사과문 발표는 앞뒤가 바뀌었다. 블랙리스트의 작성 과정과 관여자를 밝혔어야 했다. 문체부는 블랙리스트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관여했는지, 그래서 소위 ‘부역자’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인지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밝힌 적이 없다. 이 때문에 문체부의 대대적인 사과는 특검 수사로 인해 실체가 규명될수록 비난 수위가 높아질 것을 우려해 물타기를 한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왼쪽) 등 간부들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앞서 머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진상을 밝혀 사과할 기회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블랙리스트 존재가 공론화된 것은 2015년 9월 국정감사 때였다. 9473명의 명단이 들어간 블랙리스트 문건이 공개된 시점은 지난해 10월이다. 문체부는 그동안 “블랙리스트를 모른다”는 조윤선 전 장관(51)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 전 장관이 구속된 이후에야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정하며 사과에 나선 것이다.

조윤선 전 장관

블랙리스트에 관한 한 모르쇠로 일관했던 문체부는 현재 ‘풍비박산’이 났다. 현직 장관이 구속되는 첫 사례를 기록하며 이미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60), 김종 전 2차관(56), 정관주 전 1차관(53)까지 구속됐다. 한 부처에서 최고 수장인 전·현직 장차관 4명이 같은 사건으로 구속된 사례는 건국 이후 찾기 힘들다. 게다가 앞으로 구속자 명단에 누가 더 포함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당장 이날 사과문을 발표한 송 직무대행 역시 블랙리스트 관여자로 의심받고 있다. 이 외에 고위직부터 산하기관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가담한 관계자가 더 밝혀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체부의 사과를 놓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그만두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문화예술인 단체들로 구성된 ‘박근혜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공범자로 추정되는 범죄자의 사과를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문체부가 진실 규명이나 관련자 처벌 없이 “졸속 사과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번 대국민사과는 문체부가 블랙리스트를 바라보는 안일한 시각을 여과 없이 드러낸 꼼수에 가깝다.

문화부 | 김향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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