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을 때 나는 희망을 품었다.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며 ‘이제는 여성들의 삶이 바뀌겠구나!’ 희망에 가슴이 벅찼다.

올해는 미투 운동으로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품은 여성들이 그동안 겪었던 차별과 폭력을 증언하며 사회의 변화를 촉구했다. 여성혐오 사회에서 자신의 발화가 어떤 어려움과 파장을 가져올지 알면서도 여성들은 용기를 냈다. 변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 미래는 없으니까.

여성의 삶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여성들의 용기가 밑거름이 되어 변화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는 신속하게 성희롱·성폭력 근절을 위한 범정부협의체를 꾸리는 등 범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법무부,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경찰청 등 문제가 제기된 핵심부처에서도 별도의 대책기구를 만들고 발 빠르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26일 여성단체 ‘페미당당’ 등이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주최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에 참가한 여성 125명이 경구용 임신중단약인 ‘미프진’을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범 1년3개월, 미투 운동 6개월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무엇이 변했는가? 하나의 사안이 발생할 때는 그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유사한 ‘하나’들이 생기고 그 양이 늘어나면 이는 개별 현상을 넘어 ‘기조’이고 ‘방향’이 된다.

미투 운동의 상징이며 한국 사회의 새로운 성폭력 규범 정립의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에 대한 법원의 무죄 판결. 미투 운동의 후속 대책으로 마련된 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성평등 추진체계 인력과 예산에 대한 행정안전부와 기획재정부의 제동. 하루에도 수백명의 여성들이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면서도 안전하지 않은 의료 환경에서 심지어 처벌에 대한 두려움까지 떠안고 임신중절을 하는 상황임에도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다른 중요한 사안을 이유로 차기 재판부로 미룬 헌법재판소. 국민의 건강과 보건을 책임지고 특히 임신중절과 관련한 주요법안인 모자보건법의 주무부처임에도 헌법재판소 낙태죄 심리과정에서 ‘의견 없다’며 책임을 방기한 보건복지부. ‘임신중절수술은 비도덕적 진료행위’라고 규정한 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날치기 고시. 불법촬영과 촬영물 유포에 대한 경찰의 편파수사와 무수한 법원의 편파판결. 개각 대상에 3명의 여성장관과 미투 운동 핵심부서인 여성가족부를 포함한 청와대….

일련의 사건들은 현재 문재인 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법과 행정을 퉁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분리할 수 없음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이 기막히다.

모 방송에 출연한 불법촬영물 삭제업체 대표는 삭제를 의뢰했다가 자살해 연락이 끊기는 사례가 100건 중 3~5건이나 된다고 말했다. 이유조차 모른 채 가족들은 딸, 누나, 엄마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고시로 의사들은 임신중절수술을 전면 금지하겠다 한다. 얼마나 더 여성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려야 하는가? 

이제라도 문재인 정부는 입에 발린 수사와 이벤트가 아닌 구체적인 인력과 예산정책, 그리고 실질적인 법집행으로 답해야 한다. 올 한 해에만 거리에 나선 수십만명의 여성들. 국가에 대한 복수로 비혼·비출산을 선언하는 20~30대 여성들. 직장 내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항해 노조를 만들고 싸우는 여성들….

문재인 정부는 그들을 똑똑히 봐야 한다. 그들은 분명한 변화가 보일 때까지 결코 물러나거나 주저앉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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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이하 <그알>)는 성범죄동영상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에도 해당 영상이 사라지기는커녕 ‘유작(遺作)’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충격적인 실태를 고발했다. 피해자는 전문업체에 돈을 주고 삭제를 의뢰했지만 동영상이 사라지지 않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영상은 피해자가 숨진 뒤에도 웹하드 사이트에서 100~150원에 거래돼 왔다고 한다.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알>은 성범죄동영상을 전문적으로 올리는 이른바 헤비업로더와 웹하드사이트 운영업체 간의 범죄적 공생관계를 파헤쳤다. 웹하드 업체들은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성범죄동영상 업로더들을 경찰의 단속이 미치지 않도록 감싸왔다고 한다. 경찰이 업로더의 신원정보를 요청하면 업체들은 외국인 명의의 가짜정보를 보내 조사를 막는다. <그알> 취재에 응한 헤비업로더는 웹하드 측이 ‘신변보호를 해줄 테니 일을 계속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고 폭로했다.

웹하드 업체들은 불법영상물을 걸러내는 ‘필터링’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매출하락을 우려해 필터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업계 관계자 증언도 나온다. 웹하드 업체들이 성범죄동영상 업로더들과 공범상태에 있거나 한술 더 떠 범죄를 교사하고 있는 형국이다. 현실이 이렇지만 사법당국이 이들에 대해 제대로 된 단속과 처벌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알>에 등장한 헤비업로더는 경찰에 적발됐지만 벌금 5만원을 받는 데 그쳤다고 증언했다.  

지난 4월 말 문을 연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에는 두 달여 만에 800명 가까운 여성 피해자들이 영상물 삭제를 요청했고, 삭제지원 건수도 3000건을 넘어섰다. 하지만 한번 유포된 불법 동영상이 완전히 삭제되는 일은 드물다. 일본에서 합법적인 성인영화인 것처럼 유통된 뒤 국내에 역수입되고 있다는 증언도 나온다. 성범죄영상물 피해자들이 성폭력 피해자보다도 더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은 이처럼 ‘한번 찍히면’ 근절되기 어려운 현실 때문일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디지털성범죄의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불안감은 수만명의 여성들이 세 차례나 서울 도심에 모여 불법촬영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사법당국은 디지털성범죄의 실상을 분석해 치밀하고 종합적인 근절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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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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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에 대한 경찰의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2차 대규모 집회가 지난 9일 서울 도심에서 열렸다. 지난달 19일 1차 집회 때보다 참가자(주최 측 추산 3만여명)가 더 늘어났고, 일부 참가자들은 삭발을 하기도 했다.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불편한 용기’ 주최로 혜화역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남자에겐 화장실, 여자에겐 불법촬영장’ 등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성차별 수사 중단하라” “여성 유죄, 남성 무죄” 등의 구호를 외쳤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2차 규탄 시위’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여성에 대한 불법촬영 중단을 촉구하며 삭발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불편한 용기’는 9일 발표한 성명에서 불법촬영 및 유포행위를 보다 강력하게 처벌할 것을 사법부에 요구하는 한편 현재 계류 중인 불법촬영 관련 법안을 신속히 입법할 것을 국회에 촉구했다. 기업 내 여성 고용 50%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제정하고, 남녀 임금격차를 공개하는 법과 성별에 따른 차별임금을 금지하는 법을 마련하라는 요구도 내놨다. 집회를 관통한 핵심 메시지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성별을 이유로 한 불평등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여성을 2등 시민으로 대우하고 있으며, 여성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여성들의 주장은 불법촬영 수사만이 아니라 고용, 임금을 포함한 모든 일상을 통해 각성되고 집약된 것이다. 불법촬영 수사는 차별감이라는 화약고에 던진 성냥불이었을 뿐이다.

지난달 19일 집회 이후에 두번째 대규모 집회를 연 이유는 정부의 대응이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여성대상 범죄를 중대범죄로 다루는 ‘인식의 전환’을 언급했고, 경찰이 불법촬영물 집중 단속에 나섰지만 대부분 남성들로 구성된 권력기관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깔려 있다. 지난 3일 여성 8명의 신체를 불법촬영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자 대학생에게 법원이 “짧은 치마로 보이지 않고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낄 것 같지 않다”며 무죄를 선고한 것도 기름을 부었다. 집회 성명에서 ‘남성 경찰청장과 검찰총장을 파면하라’는 주장이 등장한 것은 남성중심의 권력기관이 성평등 문제를 해결할 리가 없다는 근원적인 불신감의 표출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평등 문제는 이제 북핵 문제나 사회경제적 쟁점 못지않게 폭발력이 큰 의제가 됐다. 여성들에게는 북한 핵보다 불법촬영이 더 위협적인 일상의 공포다. 적당히 관리하는 선에서 무마하려는 태도는 더 큰 분노를 살 뿐이다. 혜화역에 모인 여성들의 외침을 깊게 듣고 새겨 근본적인 변혁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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