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랫동안 미뤄왔던 주제에 대해 도전해 보려 한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6월 초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은 뇌물과 성접대를 받은 혐의로, 건설업자 윤중천은 강간치상과 사기 등 혐의로 각각 구속 기소되었다. 유력 검사와 건설업자 간의 불법 커넥션, 김학의 이외 고위층 남성들의 리스트를 거머쥔 ‘윤중천 리스트’, 호화 별장과 성접대, 2013년 검찰수사와 재수사에서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 논란, 마약류를 먹인 후 성폭력을 했고 불법촬영으로 협박했다는 증언까지, 이른바 별장 성접대 사건에는 한국 사회의 비리와 음험한 권력의 결탁이 파노라마처럼 담겨 있다. 

김학의, 윤중천의 구속 기소는 사건을 공개하고 증언한 피해여성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도 검찰은 두 차례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검찰이 김씨가 여성들을 성폭행한 것이 아니라 성접대를 받았다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보도에 따르면 폭행·협박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장도리]2019년 6월 6일 (출처:경향신문DB)

첫째, 성폭력이란 폭행·협박을 사용했을 때 성립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행해지는 것일 때임을 입법부, 사법부, 경찰이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기본권으로 선언한 나라에서 마땅한 법의 해석이다. 최근 미투 운동은 폭행·협박이 행사되지 않은 강요된 성폭력이 만연했음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입법부는 성폭력 법제를 대대적으로 구조 개혁해야 한다. 

둘째, 성접대를 ‘한’ 사람은 피해여성이 아니라 윤씨이다. 굳이 여성을 주어로 쓰고자 하면 ‘여성이 성접대의 매개 혹은 대상’이 되었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성접대라는 용어 자체가 남성과 남성 간의 교류·결탁·형제애 등을 나타내고 여성은 철저히 소외·배제·타자(他者)가 된다. 제3자가 성접대를 ‘했다면’ 그 매개가 된 여성은 무엇을 했던 것인가. 이 사건의 피해여성이나 다른 피해여성들이 이후 어떤 대가를 받았건, 그렇지 않건,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지속적으로 해야 했고, 이에 대해 거부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면 그것은 폭행과 협박을 동반한 일회성 성폭력보다 훨씬 더 중대한 성적 유린이자 인권 침해이다. 이것을 성접대라고 이름 붙인다면 피해여성들은 피해자가 아니게 되어 그녀들에게 자행된 폭력·마약·불법촬영·협박 등 행위의 불법성을 따질 수 없게 된다. 법원과 검찰은 이 사건을 다시 보라. 

셋째, 이런 사건의 지독함은 그 체계적 성격에도 있다. 성폭력 가해자(들)와 피해자(들)라는 2자관계를 상정하는 우리 형법의 성폭력 범죄와 달리 현실의 많은 성폭력은 제3자가 계획하고 조정하고 촉진하는 양상을 띤다. 김학의 사건이나 ‘버닝썬’, 장자연 사건에서처럼 말이다. 예컨대 독일형법 제177조 제2항에는 “타인에 대해 성적 행위를 실행하거나 그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하거나 그로 하여금 제3자에 대해 성적 행위를 실행하거나 제3자의 성적 행위를 수인하도록 만드는 자는, 범죄행위자가 타인이 반대의사를 형성하거나 표시할 수 없는 상황에 있음을 이용하는 경우, 범죄행위자가 타인으로 하여금 성적 행위를 실행하거나 수인하도록 느낄 수 있을 만한 해악으로 위협함으로써 강요한 경우”에도 처벌된다고 규정한다. 이처럼 독일형법의 성폭력에 대한 정의는 우리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피해자는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매우 취약하여 문제된 성적 행위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시할 수 없거나 그 성적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을 때 받을 해악으로 위협받는 경우 등을 상정한다. 또 제3자에게 성적 행위를 실행하게 하거나 그의 행위를 수인하도록 하는 입체적 관계를 상정한다. 이는 전시(戰時) 성폭력을 통해 본 법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윤중천과 김학의 간의 결탁, 이것이 다시 김학의와 다른 동료 검사 간의 유착관계로 확대된다면 이 성폭력의 발생과 지속, 은폐는 매우 체계적인 성질을 가진다. 

넷째, 성접대라는 표현은 적어도 법의 언어로 쓰여서는 안된다. ‘위안부’라는 표현처럼 가공할 폭력을 ‘위안’으로 덧씌우고 피해여성들의 위엄을 우롱하기 때문이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최근 검경 수사권 조정에 대해 언급하면서 ‘국민의 인권보호에 흠결이 생길 수 있다’ 하였다. 검찰과 경찰이 범죄 증거를 가지고도 그저 성접대쯤으로 호도함으로써 이 사건들을 남성들의 리그로 만든다면 여성국민의 인권이야말로 흠결 속에 남을 것이다. 존엄한 여성들을 기껏 교환대상으로 삼은 최근의 성폭력 사건들을 검경 수사권 문제로 몰고 가거나 이용하지 마라.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공권력은 여성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지니며, 여성들이 당한 피해는 법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양현아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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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2심 선고가 다가오고 있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8월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피해여성’이 TV 저녁뉴스에 직접 출연하여 차기 대선주자로까지 촉망받던 정치인의 성폭력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많은 이에게 충격을 주었으리라.  

안 전 지사에 대해 검찰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강제추행의 혐의로 기소했지만, 법원은 ‘위력은 존재했지만, 위력을 행사하지 않아서 간음과 위력 간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다고 볼 만한 피해자의 행위나 태도 등을 발견할 수 없다’는 취지로 무죄선고를 하였다.  

여기서 위력이란 ‘상대방의 의사를 제압할 정도의 유형력·무형력’으로 폭행과 협박뿐 아니라 지위와 권세의 이용까지 포함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성적 행위를 할 것인지 여부와 그 상대방 및 방법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고, 성적 침해 행위를 방어하고 배제할 권리를 뜻한다. 그런데 법원과 실정법이 이런 권리를 선언하기만 하면 ‘선뜻’ 여성들이 그러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에 대한 항소심 결심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9일 오전 서울 서초동 고등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안 전 지사는 같은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바 있다. 이준헌 기자

헌법재판소는 2009년 혼인을 빙자하여 간음한 남성을 처벌하는 ‘혼인빙자간음죄’가 여성의 성적 결정을 혼인과 결부시킨다는 점에서 구시대적이며, 혼인이나 남성의 의지에 따라 성적 결정을 하는 존재로 여성을 ‘유아시’한다는 이유 등으로 위헌결정을 내렸다. 또한 2015년에는 형법상 간통죄가 혼인제도 및 부부간 정조의 의무 보호라는 공익을 더 이상 실현하기 어려운 반면, 국민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 위헌결정을 내렸다. 이런 사회적 맥락 없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어법에서 나는 자유보다는 비현실성과 허구성을 느낀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은 아직 마련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가진 권리를 왜 행사하지 않았냐고 묻는 법의 태도는 목숨을 바꾸어 순결을 지키라는 ‘정조’개념과 무엇이 다른지도 의문이다. 바야흐로 성적 자기결정권의 시대가 적어도 법원에는 도래한 듯하다.   

성적 자기결정권과 관련해 안 전 지사 사건에서는 먼저, 그림자처럼 상관을 수행해 왔던 비서가 상관이 ‘안아달라’와 같은 말을 할 때 저항의 뜻을 선명하게 표명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성적 제안을 상관이자 남성 권력자로부터 받았을 때, ‘얼버무리는’ 의사표시야말로 ‘정상적 판단능력을 갖춘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저항이 아니었을까 한다. 둘째, 만약 이 남성 상관에게 언어나 물리적 수단으로 밀치고 거부의사를 밝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직장에서 떠나야 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였을 것이다. 거부의사를 밝혔으니, 간음과 추행의 ‘미수’로 판단받기는 어려울 것이고, 존경하는 도지사를 폄훼하는 그녀에게 공감을 표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녀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셋째, 안 전 지사와 피해여성의 관계란 단지 두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다른 수행원, 직원 등 수백명의 조직 속에 ‘놓여진’ 관계이다. 그들은 안 전 지사와의 인연으로 직장을 갖기도 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안 전 지사는 그들 모두에게 상징적 자산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체계 속에 ‘위치한’ 성폭력의 모습이다. 나는 상상한다. 그녀가 안 전 지사의 성적 제안과 행위에 저항을 포기했던 바로 그 지점, 밀치고 소리 지르고 알린다고 해도 별 승산이 없다고 느꼈을 바로 그 지점이 안 전 지사의 ‘위력’이 그녀의 몸과 머리와 신경선을 흘러내리며 다녔을 순간일 것이라고. 법원은 이제 물리적 권력을 넘어 사회적·관계적 권력에 대한 법리를 구성해야 한다. 넷째, 이상한 점은, 어째서 1심 선고문 어디에도 피고인과 피해자가 ‘애정하는’ 사이라면 있어야 할 사귀었던 사실에 대한 적시가 없는가. 여전히 법원은, 언론은, 한국 사회는 여성이 ‘죽도록 저항하지 않으면’ 남성의 성관계에 은밀한 동의를 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거대한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피고인의 일방적인 성적행동을 법원은 미세하게 포획하여 그것이 바로 추행이고 성폭력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리하여 일자리와 사회적 생명을 걸지 않아도 되는 성적 자기결정권리를 만들어가야 한다.  

최초 피해 발생 이후, 항변의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8개월이 걸렸다면 피해여성은 매우 합리적인 여성인 것이다. 참고로, 가정폭력 피해자는 도움을 청하는 데 6년 이상의 시간이 드는 경우가 40%나 된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6). 피해여성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잘못은 대부분 너의 책임이라고 하는 젠더의 불평등구조가 건재한데도 그녀는 얼굴을 드러내고 만천하에 보고했다. 그것은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생명을 건 위태로운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였다.

<양현아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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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문 전문(114쪽)을 읽었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떠올렸다.

법리. ‘문제적 판결’이 나올 때, 법관들은 법리 뒤에 숨는다.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 부장판사)에 묻는다. 법리에 따라 판단했는가? 재판부는 ‘위력은 존재했으나 행사되지 않았다’고 했다. 형법 303조 1항은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해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해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를 처벌토록 하고 있다. ‘위력으로써’라 했을 뿐,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구분한 바 없다. 대법원 판례도 다르지 않다.

성폭행 등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 14일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청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위력이 폭행·협박 등 다른 수단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면 위력이 아니다. 존재 자체로 약자를 복종시키기에 위력이다. 물리력이 작용했다면 위력간음이 아니라 강간죄로 기소됐을 것이다. 백보 양보해, 존재와 행사를 구분하는 법리를 받아들인다 치자. 재판부는 “(러시아에서의) 간음 전 단계에서 피고인이 행한 신체접촉은 포옹한 행위뿐이고, 언어적으로는 외롭다고 안아달라고 말한 것뿐”이라며 위력행사가 아니라고 봤다. 하급자라면 상급자의 포옹쯤은 용인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게 법리인가.

질문.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형사사법의 원칙이다. 다만 피고인에게 물어볼 사항은 철저히 물어봐야 한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에게 묻지 않았다. 왜 피해자의 폭로 직후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 입장은 잘못’이라는 글을 올렸는지, 왜 검찰과 법원에선 입장을 바꿔 합의한 관계라고 했는지. 왜 업무용 휴대전화를 검찰에 제출하지 않았는지. 법정에서 신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최소한 판결문에는 진지하게 질문한 흔적이 없다.

신화. 판결문은 ‘이상적 성폭력 피해자’의 자격을 예시한다. 피해를 입기 전에는 당당하고 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고개를 떨구고 ‘아니요’라는 말을 중얼중얼거렸다는데, 피고인이 거절 의사를 인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어렵다” “미투 운동의 가치에 반한다고 언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뒤에는 취약해져야 한다. 한밤중 지인에게 연락해 울고불고하거나(“새벽 통화내역을 보면, 피해를 호소한 연락은 보이지 않는다”), 직장 업무도 포기해야(“사건 발생 직후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집을 물색하려 애쓴 점”) 한다. 재판부는 가공의 피해자상을 설정한 뒤 김지은씨가 여기에 들어맞지 않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피해자다움’이란 신화에 매몰된 결과다.

오남용. 재판부는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만큼 성숙한 사람이라는 점을 무죄 근거로 삼았다. 개념의 오용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권리주체가 행사해야 하는 게 아니라, 타인이 존중하고 사회가 보장해야 하는 권리다. 원치 않는 성관계를 ‘맺지 않을’ 권리를 넘어 ‘요구받지 않을’ 권리까지 포괄한다. 재판부는 가장 명료해야 할 형사판결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개념어를 끌어들였다. 그것도 25차례나 남용했다.

내재적 접근. “피고인이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문자를 보낸 취지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저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도지사와 비서라는 지위와 20살 이상 나이 차에서 오는 죄책감에 따른 사과라고 볼 측면도 없지 않다.” “피해자는 차량 탑승 시 피고인 옆 좌석에 앉도록 지시받았다고 진술했는데, 거리를 가깝게 함으로써 피해자 위상을 격상시키는 조치로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법관에게 허용되는 자유로운 심증 형성 차원을 넘어 피고인에 빙의한 수준 아닌가.

재판부는 ‘노 민스 노’(No means No·거부해도 성관계하면 강간) 룰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 법이 있었다면 재판부가 피해자 손을 들어줬을까. 판결문에 드러난 젠더감수성에 비춰보면 그랬을 가능성은 낮다. 재판부는 고민과 학습이 부족했고, 관성적으로 판단했다. 입법 탓은 책임 회피다.

시민은 법원에 혁명적 상상력을 기대하지 않는다. 상식적 판단을 바랄 뿐이다. 지난 18일 ‘성폭력·성차별 끝장 집회’에서 분노한 여성들을 만났다. “직장에서 상사들의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데, 법원은 세상에 그런 일이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판결한 거죠.”(윤모씨·37·프리랜서) “위력은 존재하나 행사되지 않았다고요? 말장난 아닌가요?”(문지영씨·34·회사원)

미국 법학자 프레드 로델은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에서 말했다. “부족 시대에는 주술사가 있었다.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법률가가 있다. 어느 시대에나, 기술적 수법에 뻔뻔하고 그럴듯한 말장난을 첨가해, 인간 사회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영특한 무리들이 있었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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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해 1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이 사건은 정상적 판단력을 갖춘 성인남녀 사이의 일이고, 저항을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 강제력이 행사된 구체적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페미니스트 사라 아메드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인종차별과 성차별 때문”이라고 말한다. 재판부가 김지은의 언행을 해석하여 위력 행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있으므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지적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증언을 증거 삼아, 재판부는 안희정의 위력 행사를 심판하지 않고 김지은의 피해자다움만 심판했다.

아는 사람들 사이의 성폭력 사건일수록 이미 형성된 관계 때문에 피해 사실에 대해 의심받기 쉽다. 가해자의 변론은 획일적이다. 피해자가 보였던 친절과 호감은 피해자의 연애감정, 두 사람이 사귀었다는 주장으로 왜곡되고 성적 합의의 근거로 이용된다. 사건 이후 피해자가 즉시 적개심이나 거리감을 보이지 않는 것 역시 피해가 없었다는 증거로 둔갑한다. 직장, 학교, 군대 등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의 경우 사건발생 후 피해자가 일상의 업무를 ‘멀쩡하게’ 수행했고 가해자에게 여전히 친절하고 순응적이었다는 점이 가해자의 변론에 동원된다. 직장 내 성폭력을 가장 많이 당하는 집단은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말단 신입직원 등 가장 취약한 여성들인데, 그들에겐 좋든 싫든 상사에 대한 친절과 복종이 업무의 일부이다. 위계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형 성범죄는 취약함 자체를 성적으로 착취할 뿐 아니라, 범죄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취약한 피해자의 상대적 무력함을 다시 한번 이용한다.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감정을 문제 삼으면서 피해자가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 얼마나 고통을 드러냈는지를 심문하는 재판의 양상은 가해자의 시각을 공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안희정 사건 판결에 여성들이 항의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혐의 내용을 구성하는 첫번째 사건 다음날 아침에 원고가 “러시아에서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를 하는 식당을 찾으려 애쓴” 것을 재판부는 두 사람 사이 위력의 작용이 없었다는 근거로 인용했다. 상사를 향한 여성 부하직원의 이타적 연애감정을 전제하고, 합의된 성관계 후 남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꺼이 찾아내서 먹인 행위로 본 듯하다. 이 남성중심적 상상의 관점은 도지사의 심기와 호불호를 살펴 순두부를 찾는 업무를 수행하는 비서가 애당초 도지사와의 성관계에 합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동등한 입장에 있었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다음날 남자에게 아침을 차려 주었다거나 일상적인 메시지를 보냈다고 증언한다. (러시아에서까지 왜 안희정이 아침에 꼭 순두부를 먹어야 했는지, 좋아하는 음식을 출장지에서 찾아내는 일을 비서에게 시키는 게 고위공무원으로서 당연한 일인지 여기서 묻지 않겠다. 수많은 비서와 부하직원들이 상사를 위해 이런 부류의 업무를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사회니까.)

그런데 김지은이 철저한 심문의 대상이 된 반면, 안희정의 언행은 판결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안희정이 “맥주를 든 피해자를 포옹한 것”과 “ ‘외롭다, 안아달라’고 말한 것”을 재판부는 “위력의 행사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 부적절한 접근을 위력의 행사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명시하지 않는다. 그 외엔 안희정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낱말 하나로 한밤중에 담배며 술을 방으로 가져오라는 지시도,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주장은 잘못”이라던 처음 진술을 그가 번복했다는 사실도 논하지 않는다. 재판부는 안희정이 미투를 언급하면서 부적절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드러냈던 것에 대해서는 해석하지 않으면서, 김지은이 미투에 대한 인식이 있었지만 오피스텔을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적극적 저항 의지 부재로 해석한다.

위력은 물리적 폭력이나 암시적 협박으로만 발휘되지 않는다. 위력을 경험해 본 사람은 이해하겠지만 그것은 “정상적 판단력을 갖춘 성인남녀”를 합리적 판단과 행위의 맥락에서 탈구시키는 힘이다. 일상적인 것일 수도 있는 성적 접근이 불평등한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면 취약함을 착취하는 행위가 된다. 재판부는 위력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안희정의 “안아달라”는 말이 위력의 행사인지에 합리적 의심을 가진 반면, 물리적 강제력이 없어도 김지은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하는 취약한 위치에 있었던 건 아닌지에 합리적 의심을 갖지 않았다. 결국 안희정의 범죄 여부는 안희정이 아닌 김지은의 언행에 대한 판단에 의거해서 결정되었다. 위력을 가진 남자의 행위가 범죄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법적 판단에서 피해여성이 심판받는 이 곤혹스러운 부조리함은, 공적 판단이 위력을 가진 남성의 가치기준 위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이 판결이 수많은 안희정들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기에 두렵고 염려스럽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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