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15일 버닝썬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가수 승리(본명 이승현)가 속해 있던 카카오톡 대화방 내에서 ‘경찰총장’으로 불렸던 윤모 총경은 경찰 수사 단계에서는 뇌물죄를 벗었다. 268만원 상당의 10여차례 골프 및 식사 접대 등을 받았지만 직무 연관성을 인정하면서도 대가성이 없다는 것이다. 액수가 작아 청탁금지법상 과태료 처분 대상일 뿐 형사처벌은 어렵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단속사항을 확인해준 것에 대해서만 직권남용 및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폭행사건 피해자 김모씨가 제기한 경찰의 증거조작·폭행 의혹 등도 대부분 무혐의로 결론났다. 지난 3월부터 서울청이 광역수사대 전담팀까지 꾸려 벌여온 경찰유착 수사는 큰 죄는 없고, 작은 죄만 묻는 수준에서 끝났다. 누가 봐도 ‘제 식구 감싸기’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5월 16일 (출처:경향신문DB)

경찰이 벌인 106일간의 수사 결과도 ‘구속 4명, 기소의견 검찰 송치 5명, 전·현직 경찰 11명 입건·내사, 카톡방 멤버 수사 중’이 전부다. 사법처리된 사람이 많다고 수사가 잘됐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승리 수사만 봐도 경찰 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보여준다. 승리는 12차례의 조사와 18건의 조서에도 불구, 구속을 피했다. 법원은 승리에게 제기된 혐의에 대해 다툼의 여지가 있고, 증거인멸 가능성도 적다고 했다. 경찰은 구속영장 재신청을 포기한 듯하다. 수사에 허점이 있음을 자인한 꼴이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최근 경찰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검경 수사권 조정안은 형사사법에서의 반칙과 특권을 없애라는 국민적 요구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안 핵심 원칙 중 하나가 ‘경찰의 1차적·본래적 수사권 및 수사종결권 부여’다. 버닝썬 수사를 보면 ‘제 머리도 못 깎으면서 남의 머리는 제대로 깎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만 든다.

버닝썬 사건은 사회의 온갖 비리가 드러난 부끄러운 현장이자,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다. 폭행과 마약, 성폭력, 불법동영상 유포, 경찰유착 등 한국 사회의 병폐를 여과없이 드러냈다. 수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경찰이 부실수사의 오명에서 벗어날 기회는 남아 있다. 버닝썬 사건은 관련자 몇 명을 구속하고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어서도 안된다. 마약 유통·성폭력·불법동영상 유포 근절 등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 시행해야 한다. 경찰만 나서서 될 일도 아니다. 정부와 사법당국, 정치권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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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정준영씨가 불법 촬영한 성관계 동영상을 ‘빅뱅’ 멤버 승리 등이 포함된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올린 사실이 드러났다. 피해 여성만 10명이 넘는다고 한다. 승리가 사내이사로 있던 ‘클럽 버닝썬’ 내 폭행 사건이 마약류 유통,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성매매 알선, 경찰 유착 의혹 등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니 불법 동영상 유포 범죄까지 확인된 것이다. 최악의 막장 드라마가 현실로 옮겨진 듯한 ‘버닝썬 사태’에 시민은 충격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씨 등의 ‘단톡방’ 대화를 보면, 동료 연예인들 사이에서 불법촬영물 공유가 일상적으로 이뤄져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피해자를 둘러싸고 나눈 대화는 차마 지면에 옮기기 어려울 만큼 혐오스럽다. 자신들의 행위가 범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더 충격적이다. 승리가 은퇴를 선언했고, 정씨도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그대로 믿기 힘든 이유다.

성관계 동영상 불법촬영과 유포 논란을 빚고 있는 가수 정준영이 14일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로 들어서고 있다. 강윤중 기자

정씨는 과거 불법촬영 혐의로 수사를 받았으나 유야무야됐다. 이번에도 단톡방 대화 내용에서 ‘경찰총장’이라는 단어가 발견되는 등 경찰 고위층 연루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경찰의) 비위나 범죄가 발견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단죄할 것”이라고 했다. 경찰은 신속하고 엄정한 수사로, 한 점 의혹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을 몇몇 연예인의 도덕적 해이나 일탈로 치부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단톡방에서 불법촬영물을 공유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행태는 상당수 남성 사이에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자행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서는 여성의 신체 부위 등을 찍어 올리는 ‘여친 인증’ 릴레이가 벌어져 남성 13명이 검거됐다. 남자 대학생들이 학과 내 남학생만 모이는 ‘남톡’에서 같은 과 여학생을 성희롱한 사례는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대신 성적 대상화하는 왜곡된 남성문화가 빚어낸 참담한 현실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성폭력과 성착취의 질긴 카르텔을 고발하고 폭로해왔다. 하지만 돈과 힘, 명성을 가진 이들은 공권력과 유착해 법망을 빠져나가는 경우가 빈번했다. 더 이상은 안된다. 여성은 포획·전시·공유될 수 있는 사냥감이 아님을 선언해야 한다. 당장은 ‘정준영 동영상’의 피해자가 누구일지 추측하고 루머를 유포하는 행태부터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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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일본군 전시 성폭력 생존자이자 인권·평화 운동가였던 김복동 선생께서 93세의 나이로 영면하셨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그 전쟁에 참전한 남자들은 그의 몸을 강탈하고 강간했다. 살아남아 되돌아온 고국의 독재자는 그의 거대한 상처와 폭력의 기억을 경제차관 몇 푼에 도매금으로 팔아넘겼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수년이 지나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문제는 3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았고, 대통령이 된 독재자의 딸은 이번에는 외교를 위해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했노라고 선언했다. 납득할 수 없었던 그는 계속해서 싸웠다. 그리고 끝내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 속에서 남은 이들에게 계속 싸워줄 것을 당부하며 숨을 거두었다. 역사의 버거운 상흔들이 고작 하나의 개인이었던 자신에게 몰려드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숨죽이고 가만히 있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여전히 세계 어딘가에서 자행되는 전쟁 성폭력을 규탄하고, 그들에게 힘이 되고자 했다.

국민대학교 평화의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세움' 학생들이 3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어쩌면 그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이 폭력의 예사로움을, 광범위함을, 일반성을. 한국에만 국한시켜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전시 강간이 즐비하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도 계엄군에 의한 강간 및 성고문 등이 자행되었음이 드러났다. 국가 단위의 역사는 전쟁을 언제나 승리나 패배의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심지어는 거기에서 어떤 명예를 찾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전쟁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을 이들에게 주어지는 승리나 명예는 없다. 반면 패배에 대한 대부분의 대가는 바로 이 무관한 자들이 치르게 된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 사회가 ‘위안부’를 바라보기 두려워한 것은, 그것이 이 사회, 무엇보다도 남자들을 비추는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민족이라는 이름의 흐릿한 필터를 들지 않으면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없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상당부분 ‘약소국의 설움’에 머물러있다. ‘우리’가 힘이 약해서 ‘누이’들을 지키지 못했고, ‘우리’는 여전히 힘이 약해 강대국인 일본에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계관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 겪어서는 안될 일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공감과 분노가 아니라, 힘이 약한 ‘나’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울분이다.

이것은 민족의 설움 같은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일본 군인만 저지르는 악행이 아니라, 지금도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성들의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고, 모든 배경과 이유는 뒤로 물러나야 마땅한 것이다.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비분강개하는 남성들의 수와 모든 강간과 성폭력이 그 자체로 악이고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남자들의 수는 왜 이렇게나 차이가 날까? 왜 일본이 저지르면 악이지만 동포가 저지르는 성폭력은 ‘꽃뱀일 수도 있는’ 문제일까?

때때로 나는 온라인상에 그 많은 남성들이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이 ‘정당한 성폭력이 존재한다’는 아닌지 고민한다. 하지만 그 어떤 행위에 대한 처벌도 강간일 수는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정당한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함이지, 처벌하는 자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폭력에 대한 반대가 없는 ‘미안함’은 그저 남자의 얼굴을 한 ‘민족’에 바치는, 그마저도 자기 자신을 위한 한 조각의 공명심일 뿐이다.

지하철에서 술에 취해 벌건 얼굴로 여자에게 술 먹이는 법을 떠벌이던 어떤 남자가 떠오른다. 김복동 선생이 일생을 걸쳐서 원한 것은 정의였다. 우리가 고인의 명복을 빌 수 있을 만큼은 정의로울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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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2심 선고가 다가오고 있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8월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피해여성’이 TV 저녁뉴스에 직접 출연하여 차기 대선주자로까지 촉망받던 정치인의 성폭력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많은 이에게 충격을 주었으리라.  

안 전 지사에 대해 검찰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강제추행의 혐의로 기소했지만, 법원은 ‘위력은 존재했지만, 위력을 행사하지 않아서 간음과 위력 간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다고 볼 만한 피해자의 행위나 태도 등을 발견할 수 없다’는 취지로 무죄선고를 하였다.  

여기서 위력이란 ‘상대방의 의사를 제압할 정도의 유형력·무형력’으로 폭행과 협박뿐 아니라 지위와 권세의 이용까지 포함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성적 행위를 할 것인지 여부와 그 상대방 및 방법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고, 성적 침해 행위를 방어하고 배제할 권리를 뜻한다. 그런데 법원과 실정법이 이런 권리를 선언하기만 하면 ‘선뜻’ 여성들이 그러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에 대한 항소심 결심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9일 오전 서울 서초동 고등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안 전 지사는 같은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바 있다. 이준헌 기자

헌법재판소는 2009년 혼인을 빙자하여 간음한 남성을 처벌하는 ‘혼인빙자간음죄’가 여성의 성적 결정을 혼인과 결부시킨다는 점에서 구시대적이며, 혼인이나 남성의 의지에 따라 성적 결정을 하는 존재로 여성을 ‘유아시’한다는 이유 등으로 위헌결정을 내렸다. 또한 2015년에는 형법상 간통죄가 혼인제도 및 부부간 정조의 의무 보호라는 공익을 더 이상 실현하기 어려운 반면, 국민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 위헌결정을 내렸다. 이런 사회적 맥락 없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어법에서 나는 자유보다는 비현실성과 허구성을 느낀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은 아직 마련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가진 권리를 왜 행사하지 않았냐고 묻는 법의 태도는 목숨을 바꾸어 순결을 지키라는 ‘정조’개념과 무엇이 다른지도 의문이다. 바야흐로 성적 자기결정권의 시대가 적어도 법원에는 도래한 듯하다.   

성적 자기결정권과 관련해 안 전 지사 사건에서는 먼저, 그림자처럼 상관을 수행해 왔던 비서가 상관이 ‘안아달라’와 같은 말을 할 때 저항의 뜻을 선명하게 표명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성적 제안을 상관이자 남성 권력자로부터 받았을 때, ‘얼버무리는’ 의사표시야말로 ‘정상적 판단능력을 갖춘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저항이 아니었을까 한다. 둘째, 만약 이 남성 상관에게 언어나 물리적 수단으로 밀치고 거부의사를 밝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직장에서 떠나야 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였을 것이다. 거부의사를 밝혔으니, 간음과 추행의 ‘미수’로 판단받기는 어려울 것이고, 존경하는 도지사를 폄훼하는 그녀에게 공감을 표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녀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셋째, 안 전 지사와 피해여성의 관계란 단지 두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다른 수행원, 직원 등 수백명의 조직 속에 ‘놓여진’ 관계이다. 그들은 안 전 지사와의 인연으로 직장을 갖기도 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안 전 지사는 그들 모두에게 상징적 자산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체계 속에 ‘위치한’ 성폭력의 모습이다. 나는 상상한다. 그녀가 안 전 지사의 성적 제안과 행위에 저항을 포기했던 바로 그 지점, 밀치고 소리 지르고 알린다고 해도 별 승산이 없다고 느꼈을 바로 그 지점이 안 전 지사의 ‘위력’이 그녀의 몸과 머리와 신경선을 흘러내리며 다녔을 순간일 것이라고. 법원은 이제 물리적 권력을 넘어 사회적·관계적 권력에 대한 법리를 구성해야 한다. 넷째, 이상한 점은, 어째서 1심 선고문 어디에도 피고인과 피해자가 ‘애정하는’ 사이라면 있어야 할 사귀었던 사실에 대한 적시가 없는가. 여전히 법원은, 언론은, 한국 사회는 여성이 ‘죽도록 저항하지 않으면’ 남성의 성관계에 은밀한 동의를 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거대한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피고인의 일방적인 성적행동을 법원은 미세하게 포획하여 그것이 바로 추행이고 성폭력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리하여 일자리와 사회적 생명을 걸지 않아도 되는 성적 자기결정권리를 만들어가야 한다.  

최초 피해 발생 이후, 항변의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8개월이 걸렸다면 피해여성은 매우 합리적인 여성인 것이다. 참고로, 가정폭력 피해자는 도움을 청하는 데 6년 이상의 시간이 드는 경우가 40%나 된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6). 피해여성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잘못은 대부분 너의 책임이라고 하는 젠더의 불평등구조가 건재한데도 그녀는 얼굴을 드러내고 만천하에 보고했다. 그것은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생명을 건 위태로운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였다.

<양현아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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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게 성폭력(rape) 예방 교육을 할 때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마라, 싫다고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성폭력 가해자의 대다수는 피해자와 아는 사람이고 어린이 성폭력은 더 비율이 높다(80%). 무엇보다, 압도적인 폭력 상황에서 “분명한 의사 표현”이 가능할까. 효과보다 역효과가 클 가능성이 높다.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잠재적 피해 집단을 대상으로 한 교육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오죽하면, 이런 방식을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절대로 아저씨를 쳐다보지 마라.” 아저씨라고 썼지만 가해자는 대개 아빠, 삼촌, 아빠 친구, 오빠, 교사, 의사, 경찰 등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이들이니, 모른 척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피해자에게 침묵이 강요되는 이유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 사회는 성폭력 범죄를 다룰 때 구조적 문제나 가해자의 행위보다 피해자의 동의 여부에 집착한다. 남성은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여성은 그것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처럼 결정할 권리가 불평등한 상태에서, 합의 여부를 중심으로 성폭력을 다루는 것은 애초부터 피해자에게 불리하다. 성폭력이 지속되는 이유다. 합의 상황의 복잡성을 다투는 성인 대상 성폭력에 비해, 어린이 성폭력은 사회의 공분을 사지만 생각만큼 제대로 처벌되지도 않는다. 피해 아동이 여러 명인 경우조차 사회(가족, 학교, 교회 등)는 가해자 편에 선다.

‘위계나 폭력 상황에서도 피해자는 선택할 수 있다’는 발상은 피해자의 능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피해자가 운동선수이든 전문직 여성이든 어린이든, 그것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 성폭력 발생 원인은 남성 중심적 성문화에 있지, 피해자의 인구학적 특성(나이, 학력, 직업…)과는 무관하다. 성폭력도 다른 범죄처럼 가해자의 행위만 판단하면 된다.

조직 내 위계나 물리적 폭력의 정도에 따라 피해 내용이 다를 뿐, 성폭력의 본질은 위계와 결합된 성별 권력 관계다. 이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해결은 없다. 나의 생명과 생계 그리고 평생의 경력을 쥐고 있는 상대방과 어떻게 합의가 가능하단 말인가. 본디, 합의(consensus)는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끼리도 달성하기 어려운 지속적이고 끈질긴 협상 과정이다. “합의였지?”라는 비난 때문에 피해 여성은 분노 속에 침묵한다. 성폭력은 최고의 ‘암수(暗數) 범죄’가 될 수밖에 없다.

남성에게 성(sexuality)은 유용한 도구다. 갑이 남성이고 을이 여성일 때, 권력은 성폭력으로 행사된다. 모 종목의 기대주였던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코치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낙태한 후 선수 생활을 포기한 사례만큼이나, 여자 선수를 지도하는 남성들이 룸살롱에 갈 필요가 없다는 ‘자랑’이 끔찍한 이유다.

이번 조재범씨의 경우는 온 국민이 “강력 처벌”을 바라며, 피해 여성을 응원하고 있다. 하지만 안희정씨 사건의 피해자, 미투를 한 검사도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세 사건은 피해 기간, 가해자와의 관계, 피해 성격은 다르지만 모두 위력에 의한 폭력이다.

하지만 여론은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고른’ 분노를 보이거나 옹호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판단 기준이 가해자의 폭력이 아니라 피해자의 대응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완벽한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만 인정한다. 완벽한 인간도 없는데, 완벽한 피해자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 잣대를 유독 여성에게만 요구한다. 피해 여성은 끊임없이 사건 자체는 물론, 자신의 모든 인생과 과거사를 검열당하고 변명하게 된다. 남성도 상사에게 구타당한 다음 날 ‘웃으며’ 출근하고, 자기를 때린 사람을 위해 맛집을 검색한다. 이것이 피해자가 동의한 증거인가?

체육계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조재범씨 사례는 전형적이다. 빙상연맹은 방관 정도가 아니라 범죄를 조직, 격려했다. 대한체육회, 문화체육관광부는 책임져야 한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해결 의지다. 작년 이즈음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의 모델이 되었던 우리의 미투 운동을 생각해보자. 무엇이 달라졌는가?

강력한 처벌? 필요 없다. 합리적인 처벌을 바란다. 한국은 성폭력 관련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다. 2017년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이자 미시간주립대 의대 교수였던 래리 나사르는 150여명의 여자 선수들의 고발로 360년형에 처해졌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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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문재인 대통령은 진천선수촌을 전격 방문한다.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설득하려는 취지였다. 올림픽 직전이라 당시 진천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국가대표선수들을 모아 격려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한국 쇼트트랙의 간판 심석희 선수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엔 감기몸살이라고 둘러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14년 ‘은사’(고마운 스승이라는 뜻이다)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의 폭행으로 선수촌을 이탈(실상 탈출에 가깝다)한 사실이 알려졌다. 기록이 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수촌 내 골방에서 무차별 폭행이 가해졌고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스포츠 선수들에게 꿈의 무대인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선수촌에서 나온다?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맞아서 죽을 것 같았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린 선수가 홀로 겪어야 했던 수치심과 모멸감은 도무지 실감하기 어렵다. 심석희 선수는 주 종목인 1500m에서 예선탈락을 했고 마지막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결정짓고 펑펑 울었다. 우리는 이제야 그 눈물의 의미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만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이 없었다면? 혹은 문재인 대통령이 일정에 없는 진천방문을 하지 않았다면? 그 순간 쇼트트랙 주장선수였던 피해자가 선수촌을 이탈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조재범 성폭행 의혹 사건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상습상해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지난 9월, 징역 10월을 선고받은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는 이제 성폭력 혐의를 추가로 받고 있다. 심석희 선수가 직접 재판에 나와 엄벌을 호소했던 지난 12월17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강간상해 등의 혐의로 조 전 코치를 추가 고소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심 선수는 2014년(당시 고등학생이었다)부터 올림픽 직전까지 4년간 지속적 성폭행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돌아보면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을 앞두고도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의 여제자 성추행 사건이 터졌고 바로 그 빈자리에 조재범 코치가 장비 담당 코치로 선임됐다. 우리는 성추행 사건으로 자리가 생겨 들어간 그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체육계 성폭력이 조재범이라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오랜 시간 쌓여온 소위 구조적인 문제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방증이다.

어린 선수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 지도자가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 함께 훈련을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선수가 꿈꿀 수 있는 미래는 오직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목표 이외에는 가능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창시절 동안 운동만 해온 선수는 이제 운동을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이것밖에 할 게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선수가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느낄 때 지도자는 그가 배워 온 유일한 지도방법인 폭언과 구타를 사용한다. 간혹 심하게 때린 날에는 따로 자신의 방으로 불러 직접 피멍이 든 몸에 파스를 발라준다. “네가 미워서 때린 게 아니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다”라며 달랜다. 이렇듯 체육계 성폭력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견디는 폭력과 맞물려 있다. 혹 몹쓸 짓을 하고 마음이 안 놓일 때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이 바닥에서 완전히 매장시킨다며 겁을 주면 된다. 유도 유망주이던 2011년 고교 1학년 때부터 2015년까지 유도부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지난해 3월 경찰에 고소하고 최근 언론과 인터뷰를 한 신유용씨도 “(성폭행 당시 코치가) ‘누군가한테 말하면 너와 나는 유도계에서 끝’이라고 협박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이때 피해자인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가슴에 묻고 침묵하든가 혹은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내든가. 침묵을 선택하면 평생 그들의 가슴이 멍들고, 발설을 선택하면 그들의 인생이 망가진다. 코치의 위협은 공갈이 아닌 실재였던 것이다.

선수생활을 그만둘 각오를 하고, 성폭행 사실을 세상에 알린다 해도 이후 겪어야 할 시간은 혹독하다. 얼마 전 만난 전직 체조협회 간부 성폭행 사건 피해자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나의 질문에 두 시간 내내 눈물만 흘렸다. 사건이 발생한 지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기억을 지우는 약 좀 구해주세요.” 그가 내게 한 말이다. 발설을 택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침묵을 택했을 거라고 단언한다. 다양한 형태의 2차 피해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주위의 시선도 싸늘하다. 가해자는 당당하게 연인관계였다고 주장하고 피해자는 마치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인다. 법의 심판을 호소해도 경찰, 검찰, 그리고 사법부의 대부분인 남성들은 왜 거부하지 않았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로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다.

지난해 사회 전 영역에서 미투의 광풍이 몰아칠 때 유독 스포츠 분야는 조용했다. 선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코치와 감독,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폐쇄적인 합숙소와 훈련장, 그리고 사고가 났을 때 묵인, 방조 심지어 공조하는 침묵의 카르텔까지. 이런 사건이 일어나기에 최적화된 체육계 관행과 성문화가 오히려 이번 사건의 본질이다. 지금까지 스포츠계의 미투에 무수한 미(Me)만 존재하고 연대하고 지지하는 투(Too)가 없었던 까닭이다. 

한 가지 더 뼈아픈 지적을 하자면 체육계 폭력과 성폭력에 대해 우리 모두가 일종의 공범이라는 점이다. 올림픽 메달은 선수들이 일상적으로 겪은 비정상적인 훈련 과정을 덮고도 남았다. 국민들은 열광했고 올림픽 메달순위에 집착했다. 지난해 문체부 감사를 통해 파벌과 체벌로 멍든 빙상연맹의 관리단체 지정을 권고하자 빙상계 원로들이 연판장을 돌리면서 저항했던 논리가 바로 이거다. ‘올림픽 때 메달 따줬는데 뭐가 문제냐?’

모든 걸 잃을 각오를 하고 용기를 낸 심석희 선수의 고발이 스포츠계 미투로 들불처럼 번져나가길. 더 이상 체육계에 성폭력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발본색원하길. 만약 이번에도 체육계 폭력과 성폭력을 뿌리 뽑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피눈물 흘리는 선수를 만나야 할 것이다.

<정용철 | 서강대 스포츠심리학과 교수·문화연대 공동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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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1985)는 유사 이래 여성이 어떤 일을 담당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후반 환경오염과 전쟁으로 출산율이 급감하자 남성들은 길리어드라는 전제국가를 건립하고 여성들을 잡아다가 네 부류로 나눈다. 아내, 하녀(집안일), 시녀(대리모), 그리고 비여성. 불임의 ‘아내’를 대신해 아이를 갖도록 강제된 ‘시녀’는 고위층 부부에게 자궁을 제공한다. 가사일을 담당하는 하녀들은 ‘아주머니’라 불리며 ‘시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출산과 가사,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비여성’들은 콜로니라는 게토에 갇혀 독극물을 처리하는 강제노역에 종사한다. 작년 드라마화되어 인기를 끌었고 또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미국 여성들이 낙태금지법안에 맞서 붉은 망토를 입고 “마거릿 애트우드를 픽션으로 돌려놓으라(Make Margaret Atwood fiction again)”고 외치며 시위를 벌여 더욱 화제가 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자궁의 공공화’를 둘러싼 이 기묘한 이야기가 21세기 현실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경악은 단지 미국 여성만이 아니라 ‘전국가임여성지도’를 지닌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여성의 노동은 저 <시녀 이야기>의 분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19세기 이후 여성은 법적 지위가 향상되는 것에 더불어 공적인 경제활동을 하게 되었으나 임금격차나 유리천장 등에서 보듯 현저한 남녀차별을 겪고 있다. 또한 여전히 ‘섹슈얼리티’를 부수적이며 함축적인 노동수단으로 제공해야 하는 이중노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송충이 잡는 일을 하면서 감독에게 몸을 바쳐야 했던 극빈층의 복녀를 그린 김동인의 <감자>에서부터 지주의 성적 유린, 방적공장 감독의 유혹에 시달리는 여성 ‘선비’를 그린 강경애의 <인간문제> 등 문학작품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 미투 운동이 폭로하고 있는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위력에 의한 성범죄 등은 이렇듯 ‘(여성)노동’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삭제하지 못한 남성지배구조의 장구한 역사에 대한 뚜렷한 증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연’에 기초한 성별 분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남성노동으로 가정된 노동의 변화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즉 산업화와 첨단 기술에 의해 남성 육체노동 대부분이 기계화되고 사무직과 서비스직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4차 산업혁명 이후의 ‘노동의 미래’는 기존 성별 분업의 해체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의 가사·육아 분담, 그리고 가사노동의 외주화는 임신과 출산의 기술적 진보, 돌봄로봇, 섹스로봇 등의 확산(‘킹키스 돌스’라는 섹스 인형 대여업소는 작년 토론토에 섹스 인형 성매매 업소 1호점을 열었다고 한다) 등으로 이어져 다양한 대체노동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신의 영역에 진입한 호모사피엔스는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나, 너, 남자, 여자, 사랑, 미움이 완전히 무관해지는” 특이점을 지나게 될 것인가. 이 포스트휴먼의 노동의 미래가 왠지 미심쩍은 것은 기술의 진보를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유사 이래 희소성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이 더 강력한 현실을 만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완전정복은 ‘노동 민주화’ 대신 민족, 인종, 성을 둘러싼 다양한 차별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 기술·자본력을 갖지 못한 많은 영세업체들(가구공장 등 위험한 산업현장)이 여전히 육체노동을 이주노동자에게 외주화하고 있듯이 기술에 의한 젠더 해체와 노동혁명은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돌봄과 가사 노동의 다양한 아웃소싱(홍콩에서 가사나 육아 도우미로 일하는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여성)이나 결혼이주여성의 연쇄사슬(베트남 오지의 총각은 한국으로 시집간 베트남 여성 대신 캄보디아 등으로부터 ‘아내’를 공급받고 있다고 한다), 성매매와 대리모로 생계를 부양하는 하층 여성 등을 흔히 본다.

첨단 기술과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젠더노동의 대폭발 지점은 지극히 유토피아적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일부 특권층에게나 허용된 꿈이거나 ‘노동의 종말’ 같은 디스토피아의 도래일지도 모른다. ‘인간노동’이라는 거대한 물음 앞에 함께 다다른 우리에게 더욱 시급한 것은 여성 노동의 비전보다 여전히 성적 차별과 계급차별이라는 현실에 갇힌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구원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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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의료인·언론인·교수·회계사 등 전문직 여성들의 상당수가 직장에서 각종 성희롱과 성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5일 전문직 여성 10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같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올해 불붙은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은 현직 검사인 서지현 검사가 폭로한 상급자의 성추행 사건에서 시작됐다.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성폭력이 전문직이자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검사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번 조사결과는 이 같은 잘못된 성문화가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킨다.

5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한국여성변호사회 주최로 전문직 여성 직장 내 성폭력 실태조사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조사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541명)이 ‘외모, 옷차림, 몸매 등을 성적으로 희롱·비하·평가받는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당했다고 답했다. 성적인 이야기나 음담패설을 듣거나, 고의로 신체 부위를 건드리거나 몸을 밀착시키는 행위를 당하거나 이성의 옆에 앉기나 러브샷 등을 강요당했다는 응답자도 각각 절반가량 됐다. 대면조사에 응한 전문직 여성들은 직장 상사 등이 회식 중이나 후, 또는 차량을 함께 타고 가면서 강제로 신체접촉을 하거나 모텔 등에 끌고 가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특히 전문직 여성들은 향후 불이익이 클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성폭력을 당해도 제대로 문제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이번 조사에서도 성폭력 피해 이후 문제 제기를 한 328명 중 10%가량인 33명이 ‘업무상 부당 대우를 겪었다’고 답했다. 악의적 소문이나 따돌림에 노출된 사례도 14.6%나 됐다.

조사결과는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엘리트’ 조직이라 불리는 법조계·의료계·언론계·학계 등에도 어김없이 고질화된 남성중심적인 조직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 조직에서 근무하는 남성들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다. 그럼에도 상당수 남성들이 여성 동료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잘못된 문화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남성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성폭력 예방과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처벌을 위한 법적·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최근 여성의 사회진출이 크게 늘면서 전문직에서도 새로 진입하는 인력 중 여성이 절반을 넘고 있다. 이제는 단지 ‘소수자’인 여성 배려 차원이 아니라 조직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도 구시대적인 남성중심적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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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을 상습적으로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연극연출가 이윤택씨(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가 1심에서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는 “이번 사건은 이씨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고, 소중한 꿈을 이루기 위해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들의 처지를 악용한 것”이라며 공소사실 대부분을 유죄로 판단했다. 이씨가 받고 있는 범죄 혐의가 무겁기도 하거니와, 기소 후에도 반성은커녕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해왔다는 점에서 당연한 판결이다.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으로 수사가 이뤄져 기소된 유명인사 가운데 첫 실형 사례라는 의미도 있다.

극단 단원들을 상습 성추행한 혐의(유사강간치상)로 구속기소된 연극연출가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19일 오후 서울 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법원은 이 전 감독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하고 8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와 10년 동안의 취업제한을 명령했다. 연합뉴스

양형 못지않게 주목되는 것은 판결 내용이다. 재판부는 기존 성폭력 사건 판결과 달리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토대로 유무죄를 판단했다. 재판부는 ‘폭행·협박이 없었으니 강제추행이 아니다’라는 이씨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상황과 그(추행) 행위가 이뤄진 과정에 비춰볼 때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의 행사”인 만큼 강제추행에 해당한다고 봤다. 또한 이씨 주장대로 설사 연기지도였다 하더라도 피해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가해자의 물리적 강압이나 피해자의 적극적 문제제기가 없었다 해도 성폭력 범죄가 성립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성폭력 당시 입은 상해를 넘어 우울증 등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상해 범주에 포함시켜 유사강간치상 혐의를 인정한 것도 진일보한 대목이다.

이번 판결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온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투 운동은 일상 속 성차별 구조를 깨부수고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려는 변혁의 흐름이다. 재판부가 미투 운동의 이 같은 취지를 이해하고, 기울어진 권력구조에 의한 폭력을 세심하게 짚어낸 점을 높이 평가한다. 향후 유사한 성폭력 사건 심리에서도 중요한 선례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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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은 구한말 노비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어디서 왔느냐?(Where are you from?)”였다. 이방인인 그는 이 질문이 고통스럽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다’는 평범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는 내 땅인데,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뜻이다. 익숙한 논리다. 어린 시절 어깨동무를 하고 편을 갈라 주고받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 노래가 시작이었을까.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 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訊問),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도 묻는 자의 교양, 인격, 무지, 태도를 알 수 있다.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나요?” “자네는 어느 대학을 나왔나?” “왜 아직도 취직을 못했나?” “여자가 왜 이런 일을?” 이런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인권 침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에 노출되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 상대는 어디에 ‘서’ 있는지, 내가 하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것이 평생의 화두여야 한다.

당연시되고 고착된 질문은 폭력이다. 가장 괴로운 질문은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일 것이다. 고문이 대표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질문은, 가해자(피의자)에게 할 질문을 피해자에게 하는 경우다. 성폭력 범죄가 그것이다. 조사를 가장한 피해자 비난, 여론 재판…. 유아 성폭력이거나 가해자가 여러 명인 사건을 제외하곤(?) 피해자가 질문에 시달린다. 피해자는 목숨을 건 저항 여부나 거절이 얼마나 단호하고 절절했는지, 특히 자신이 얼마나 피해자다웠는지 최대한 증명해야 한다.

1991년부터 성폭력특별법이 제정, 개정되는 과정에 참여해온 나는 전 충남도지사 사건을 통해 법정에서는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7년이다. 게다가 올해 봄, 들불과도 같았던 미투 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해자의 동의와 저항에 관한 질문은 집요하다.

이제는 동의, 저항 여부 자체가 쟁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에게 질문하자. 절도나 사기사건, 즉 다른 형사사건의 피해자에게 성폭력 피해자만큼 질문하는가? 아니, 사건 발생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가? 일단, 법정은 가해 용의자에게 질문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궁금한 것이 너무 많고, 뭐든지 질문해도 된다는 권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내가 아는 가정폭력 피해자는 40년 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환갑에 이르러 이혼 소송 중이다. 처음에는 데이트 폭력으로 시작됐다. 주변에서는 모두 결혼하면 나아진다, 아들이 있으면 그만둘 것이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 아이가 결혼하고 손자를 보면… 결국 그녀는 스무 살에 만난 한 남성에게 평생을 구타당했다.

문제는 “고쳐진다”는 통념을 수용한 피해 여성이 남편의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등 상황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통념과 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왜 때린 사람과 결혼했느냐, 왜 경찰에 신고를 안 했느냐,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는데 왜 이제야 이혼하려고 하느냐, 혹시 다른 이유(돈,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피해 여성이 폭력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당사자마다 다르고, 제3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자는 이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운동은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성별 권력관계는 더욱 그렇다. 가해자에게 질문하는 반성폭력 운동을 제안한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왜 여성을 때렸습니까? 아내를 ‘교육시킨다’면서, 교육만 시키지 왜 죽였습니까? 안 때린다고 공증까지 했으면서 왜 또 때렸습니까? 술을 마셔서 때린 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 거 아닌가요? 술을 마시고도 아내를 때리지 않는 남성이 훨씬 많습니다!

왜 비서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왜 안마를 요구했습니까? 왜 수시로 초과노동을 시켰습니까? 왜 해외 업무에 동반했습니까? 왜 평소엔 여성인권 운운했으면서, 이중적 태도를 보였습니까? 왜 자신의 성폭력 재판에 부인이 나왔죠? 본인이 생각하는 성폭력과 성관계, 사랑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피해자와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왜 불륜이라고 거짓말했습니까?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폭력과 관련한 질문 내용은 그 자체로 가해자의 시각에서 구성한 것이다. 위력의 행사가 자연스럽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가해자의 행동이 궁금하지 않다. 대신 피해자의 대응이 의문시될 뿐이다. 피해와 피해 이후의 심문. 약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법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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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서울의 한 여자고등학교 교실 창문에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한다)’ ‘위 캔 두 애니싱(We Can Do Anything·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등의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었다. 앞서 이 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성폭력 뿌리뽑기 위원회’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설문조사를 한 뒤 교사들의 성추행과 성희롱을 고발하자 재학생들이 ‘창문 미투’로 호응한 것이다. 당시 337건의 응답이 접수됐으며 이 가운데 성폭력을 직접 경험했다는 응답만 175건에 이르렀다. 결국 서울시교육청이 감사에 착수했고, 지난달 말 학교 측은 파면·해임 각 1명을 포함해 18명의 교사를 징계하기로 결정했다. 이 학교 사례는 학내 성폭력과 성차별을 폭로하는 ‘스쿨 미투’의 신호탄이 되었다.

서울 노원구의 한 여고 교실 창문이 졸업생들의 미투 고발을 응원하기 위해 재학생들이 만들어 붙인 ‘위드유’ 등의 문구로 뒤덮여 있다. 연합뉴스

여름방학 중 소강상태였던 스쿨 미투가 새 학기를 맞아 다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피해 학생들은 학교 내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스쿨미투’를 단 게시물을 공유·확산시키고 있다. 높은 인권감수성과 행동력을 동시에 갖춘 여성 청소년들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 문제는 학생들은 달라졌는데 학교와 교사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학교 측에선 주동자를 색출하고, 폭로한 트위터 계정을 삭제하라고 압박한다. 심지어 ‘벌점을 깎아줄 테니 포스트잇을 떼 오라’고 다른 학생들에게 지시한 ‘비교육적’ 교사도 있다고 한다. 제보자의 행실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2차 가해도 심각하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고색창연한 표현이 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모두 같다는 뜻이다. 요즘엔 영화(두사부일체)나 TV 예능프로그램(집사부일체) 제목으로 패러디할 때나 쓰이는 옛말이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가 한 몸일 수도 없지만, 설사 그들을 다 합친 무엇이 실재한다 해도 ‘나’라는 개인의 존엄에 앞설 수는 없다.

어떤 학교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교사가 “너희가 귀여워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는데, 변명치고도 저열하다. 학생은 귀엽다고 쓰다듬는 애완물(愛玩物)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은 중세가 아니다. 2018년이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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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피해자의 행동방식이 다양할 수 있는 만큼 ‘피해자라면 취해야 할 행위’를 일반화·유형화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2부는 강제추행·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등 혐의로 기소된 모 갤러리 대표 ㄱ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이같이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강제추행 혐의를 무죄로 본 원심을 깨고 ㄱ씨에게 징역 8월을 선고한 뒤 법정구속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가 피해자 김지은씨의 피해 전후 행동을 근거로 김씨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과 대비된다.

성폭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 청사를 빠져나가고있다. 이준헌 기자

ㄱ씨 사건의 1심 재판부는 피해자 ㄴ씨가 추행 후 즉각 항의하지 않았고 ㄱ씨와 헤어진 뒤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점을 무죄 근거로 들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러나 “피해자 진술이 일관되는 경우 객관적으로 신빙성이 없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는 한 (피해자 진술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된다”는 대법원 판례를 언급했다. 또 “피고인의 사회적 지위, 피해자가 겪을지 모를 불이익 등을 고려해보면 추행 이후 ㄴ씨가 항의하지 않았다는 태도는 피고인의 행동이 추행에 해당하는지와 관련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문자메시지 발송과 관련해서도 “성범죄 피해자의 행동방식은 피해 당시 상황이나 피해자의 처지, 피고인과의 관계, 피해자의 성격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며 진술의 신빙성을 깎아내릴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봤다.

수원지법 평택지원에서도 유사한 판결이 나왔다. 지난달 말 평택지원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된 조기흥 전 평택대 총장에게 징역 8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조 전 총장은 성추행 사실이 없으며 설사 있었다 해도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추행당한 뒤 타인에게 피고인을 칭찬한 사실이 있지만, 이는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고통을 떨치기 위해 정상적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애쓴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법과 평택지원의 두 판결은 ‘피해자다움’이라는 신화를 배격하고, 권력형 성범죄를 제재하려는 입법 취지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안 전 지사 사건 항소심을 맡게 될 재판부도 왜곡된 통념이나 가치판단에서 탈피해 법과 증거에 따라 엄정한 심리를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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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을 때 나는 희망을 품었다.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며 ‘이제는 여성들의 삶이 바뀌겠구나!’ 희망에 가슴이 벅찼다.

올해는 미투 운동으로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품은 여성들이 그동안 겪었던 차별과 폭력을 증언하며 사회의 변화를 촉구했다. 여성혐오 사회에서 자신의 발화가 어떤 어려움과 파장을 가져올지 알면서도 여성들은 용기를 냈다. 변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 미래는 없으니까.

여성의 삶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여성들의 용기가 밑거름이 되어 변화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는 신속하게 성희롱·성폭력 근절을 위한 범정부협의체를 꾸리는 등 범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법무부,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경찰청 등 문제가 제기된 핵심부처에서도 별도의 대책기구를 만들고 발 빠르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26일 여성단체 ‘페미당당’ 등이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주최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에 참가한 여성 125명이 경구용 임신중단약인 ‘미프진’을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범 1년3개월, 미투 운동 6개월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무엇이 변했는가? 하나의 사안이 발생할 때는 그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유사한 ‘하나’들이 생기고 그 양이 늘어나면 이는 개별 현상을 넘어 ‘기조’이고 ‘방향’이 된다.

미투 운동의 상징이며 한국 사회의 새로운 성폭력 규범 정립의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에 대한 법원의 무죄 판결. 미투 운동의 후속 대책으로 마련된 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성평등 추진체계 인력과 예산에 대한 행정안전부와 기획재정부의 제동. 하루에도 수백명의 여성들이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면서도 안전하지 않은 의료 환경에서 심지어 처벌에 대한 두려움까지 떠안고 임신중절을 하는 상황임에도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다른 중요한 사안을 이유로 차기 재판부로 미룬 헌법재판소. 국민의 건강과 보건을 책임지고 특히 임신중절과 관련한 주요법안인 모자보건법의 주무부처임에도 헌법재판소 낙태죄 심리과정에서 ‘의견 없다’며 책임을 방기한 보건복지부. ‘임신중절수술은 비도덕적 진료행위’라고 규정한 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날치기 고시. 불법촬영과 촬영물 유포에 대한 경찰의 편파수사와 무수한 법원의 편파판결. 개각 대상에 3명의 여성장관과 미투 운동 핵심부서인 여성가족부를 포함한 청와대….

일련의 사건들은 현재 문재인 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법과 행정을 퉁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분리할 수 없음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이 기막히다.

모 방송에 출연한 불법촬영물 삭제업체 대표는 삭제를 의뢰했다가 자살해 연락이 끊기는 사례가 100건 중 3~5건이나 된다고 말했다. 이유조차 모른 채 가족들은 딸, 누나, 엄마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고시로 의사들은 임신중절수술을 전면 금지하겠다 한다. 얼마나 더 여성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려야 하는가? 

이제라도 문재인 정부는 입에 발린 수사와 이벤트가 아닌 구체적인 인력과 예산정책, 그리고 실질적인 법집행으로 답해야 한다. 올 한 해에만 거리에 나선 수십만명의 여성들. 국가에 대한 복수로 비혼·비출산을 선언하는 20~30대 여성들. 직장 내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항해 노조를 만들고 싸우는 여성들….

문재인 정부는 그들을 똑똑히 봐야 한다. 그들은 분명한 변화가 보일 때까지 결코 물러나거나 주저앉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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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행사에 참석했다. 천안 국립 망향의동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안희정 무죄” 소식을 들었다. 예상하지 못했고 동승한 여성들도 술렁거렸다. 이번 재판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력 인사의 사건이어서가 아니라 권력형 성폭력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답’이기도 하고, 김지은씨가 많은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에 다른 미투 사건의 피해자들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재판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위력(威力)에 대한 인식이다. 재판부는 피해 여성이 경험한 위력의 정도가 의사 표현을 불가능하게 할 상황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여성을 포함해 많은 이들도 “피해자가 성인이고, 가해자 행동에 대해 자기주장을 할 시간이 충분했는데 왜 그런 관계를 ‘유지’했는지” 의문을 갖는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번 사건은 노동시장, 그것도 선거캠프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일어난 여성 노동 이슈다. 가해자는 공적 영역의 노동 문제를 사적인 관계로 둔갑시켰다. 수행비서의 노동은 지사의 모든 공적, 사적 일정을 파악하고 매사에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24시간 대기와 노동 상태’였다. 지사 개인의 하루가 곧 비서의 업무시간이었다. 모든 연락 사안에 대한 응대부터 담배, 맥주 심부름은 물론 가장 중요하게는 가해자를 위한 감정노동까지 그녀에게는 업무였다.

다시 말해, 남성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여성은 해야 했다. 가해자는 부하 직원을 녹초가 되도록 부려 먹으면서, 노동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를 ‘사랑(불륜)’이라고 주장했다. 피고용인에 대한 폭력을 ‘남녀관계’로 만드는 것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유용한 방식이다. 아무리 선거캠프라고 하지만 고용계약, 초과 착취, 불법 노동 문제를 왜 ‘연애’ 담론으로 연결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재판부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정언을 만인에게 적절하게 적용하지 못했다. 위력의 원리와 조건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영역에서 어떤 상호 작용을 통해 작동하는지 모른다면, 위력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재판부는 위력의 의미를 좁게 해석했다기보다 무지했다. 위력은 발생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인지 불가능한 권력이기 때문이다.

위력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재판부도 가해자도 보통 시민들도, 상황에 따라 위력의 위협에 노출된다. 피해자의 대응은 당사자의 캐릭터, 젠더, 계급, 나이 등에 따라 다르다. 이번 사건에서 위계의 내용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유리했다.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의 상해가 동반되는 성폭력도 있지만, 이번 사건처럼 실제로는 위력이나 가해자가 자신을 ‘고용인’이 아니라 ‘남성’이라고 주장하는 권력형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성(性)이라는 통념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를 뜻하는 젠더는 친밀성부터 폭력, 살인, 착취까지 극단의 양상을 동시에 띤다. 젠더처럼 일상의 정치는 없다. 그래서 젠더에 대한 인식이 낮은 사회는 성폭력을 지지, 방관할 수밖에 없고 특히 피해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가정폭력을 연구할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매 맞는 여성은 탈출하지 못하는가” “왜 때린 남편에게 북엇국을 끓여주는가” “왜 남편을 불쌍히 생각하는가”였다. 나는 “안기부에서 고문당하는 사람은 왜 탈출하지 못하나요, 혹시 폭력을 즐기는 건 아닌가요?”라고 되묻거나 “폭력 피해 여성이 남편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라 말했다.

여성은 자신에게 불리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적응과 저항이라는 이중 행동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일관된 존재이며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근대 형법의 전제는 의심받고 있다.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폭력뿐 아니라 인간의 어떤 행동도 명확하게 ‘예’ ‘아니요’로 설명할 수 없다.

내가 혹은 다른 여성이 이번 사건의 피해자와 같은 노동 조건에서 일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당장 그만두는 여성도 있겠지만,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미투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여성도 있을 수 있다. 재판부는 전자만을 ‘정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후자인 여성이 훨씬 많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상사에게 폭력을 당했다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는 남성은 흔치 않다.

성적자기결정권은 누구에게나 있다. 문제는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다. 피해 여성은 처음에는 가해자에게 위력(偉力), 즉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되는 의문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일했다. 위력(爲力), 온 힘을 다한 것이다. 전혀 다른 의미의 세 가지 ‘위력’이 모두 완벽하게 가해자에게 유리했다. 가해자의 힘, 피해자가 일을 중단하지 못한 이유, 피해자의 근무 태도.

결국 피해 여성의 ‘헌신’은 성폭력으로 돌아왔다. 재판부의 여성 노동에 대한 이해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를 기대한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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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문 전문(114쪽)을 읽었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떠올렸다.

법리. ‘문제적 판결’이 나올 때, 법관들은 법리 뒤에 숨는다.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 부장판사)에 묻는다. 법리에 따라 판단했는가? 재판부는 ‘위력은 존재했으나 행사되지 않았다’고 했다. 형법 303조 1항은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해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해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를 처벌토록 하고 있다. ‘위력으로써’라 했을 뿐,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구분한 바 없다. 대법원 판례도 다르지 않다.

성폭행 등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 14일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청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위력이 폭행·협박 등 다른 수단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면 위력이 아니다. 존재 자체로 약자를 복종시키기에 위력이다. 물리력이 작용했다면 위력간음이 아니라 강간죄로 기소됐을 것이다. 백보 양보해, 존재와 행사를 구분하는 법리를 받아들인다 치자. 재판부는 “(러시아에서의) 간음 전 단계에서 피고인이 행한 신체접촉은 포옹한 행위뿐이고, 언어적으로는 외롭다고 안아달라고 말한 것뿐”이라며 위력행사가 아니라고 봤다. 하급자라면 상급자의 포옹쯤은 용인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게 법리인가.

질문.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형사사법의 원칙이다. 다만 피고인에게 물어볼 사항은 철저히 물어봐야 한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에게 묻지 않았다. 왜 피해자의 폭로 직후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 입장은 잘못’이라는 글을 올렸는지, 왜 검찰과 법원에선 입장을 바꿔 합의한 관계라고 했는지. 왜 업무용 휴대전화를 검찰에 제출하지 않았는지. 법정에서 신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최소한 판결문에는 진지하게 질문한 흔적이 없다.

신화. 판결문은 ‘이상적 성폭력 피해자’의 자격을 예시한다. 피해를 입기 전에는 당당하고 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고개를 떨구고 ‘아니요’라는 말을 중얼중얼거렸다는데, 피고인이 거절 의사를 인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어렵다” “미투 운동의 가치에 반한다고 언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뒤에는 취약해져야 한다. 한밤중 지인에게 연락해 울고불고하거나(“새벽 통화내역을 보면, 피해를 호소한 연락은 보이지 않는다”), 직장 업무도 포기해야(“사건 발생 직후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집을 물색하려 애쓴 점”) 한다. 재판부는 가공의 피해자상을 설정한 뒤 김지은씨가 여기에 들어맞지 않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피해자다움’이란 신화에 매몰된 결과다.

오남용. 재판부는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만큼 성숙한 사람이라는 점을 무죄 근거로 삼았다. 개념의 오용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권리주체가 행사해야 하는 게 아니라, 타인이 존중하고 사회가 보장해야 하는 권리다. 원치 않는 성관계를 ‘맺지 않을’ 권리를 넘어 ‘요구받지 않을’ 권리까지 포괄한다. 재판부는 가장 명료해야 할 형사판결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개념어를 끌어들였다. 그것도 25차례나 남용했다.

내재적 접근. “피고인이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문자를 보낸 취지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저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도지사와 비서라는 지위와 20살 이상 나이 차에서 오는 죄책감에 따른 사과라고 볼 측면도 없지 않다.” “피해자는 차량 탑승 시 피고인 옆 좌석에 앉도록 지시받았다고 진술했는데, 거리를 가깝게 함으로써 피해자 위상을 격상시키는 조치로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법관에게 허용되는 자유로운 심증 형성 차원을 넘어 피고인에 빙의한 수준 아닌가.

재판부는 ‘노 민스 노’(No means No·거부해도 성관계하면 강간) 룰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 법이 있었다면 재판부가 피해자 손을 들어줬을까. 판결문에 드러난 젠더감수성에 비춰보면 그랬을 가능성은 낮다. 재판부는 고민과 학습이 부족했고, 관성적으로 판단했다. 입법 탓은 책임 회피다.

시민은 법원에 혁명적 상상력을 기대하지 않는다. 상식적 판단을 바랄 뿐이다. 지난 18일 ‘성폭력·성차별 끝장 집회’에서 분노한 여성들을 만났다. “직장에서 상사들의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데, 법원은 세상에 그런 일이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판결한 거죠.”(윤모씨·37·프리랜서) “위력은 존재하나 행사되지 않았다고요? 말장난 아닌가요?”(문지영씨·34·회사원)

미국 법학자 프레드 로델은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에서 말했다. “부족 시대에는 주술사가 있었다.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법률가가 있다. 어느 시대에나, 기술적 수법에 뻔뻔하고 그럴듯한 말장난을 첨가해, 인간 사회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영특한 무리들이 있었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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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가 정의를 세우지 않고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세웠다. 8월14일 ‘안희정 전 지사 성폭력 사건’ 1심 선고는 피고인을 심판하지 않고 피해자를 심판한 부정의한 판결이다. 업무상 위력을 작동시키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해석할 의지와 역량이 없음을 이번 판결은 보여준다. 페미니즘 대통령을 선언한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법부가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사건’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8월16일 (출처:경향신문DB)

재판부는 “정상적 판단력을 갖춘 성인남녀” 간에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성적자기결정권이 모두 국민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고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일까? 노동권, 교육권, 참정권 등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실현되어 왔는가? 피해와 차별을 경험한 사람의 위치에서 권리가 실현되도록 싸워야 하는 현실이다. ‘왜 성적자기결정권을 명확하게 행사하지 않았는가’란 질문은 경사로 없는 투표소를 만들어 놓고 장애인에게 ‘참정권 보장하는데 왜 투표 안 해’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다. 피해자는 성폭력이 일어난 다음날에도 피해 사실을 표현하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여성 노동자였다. 24시간 언제든 대기해야 하는 수행원, ‘맥주, 담배’ 단어만으로 지시가 가능한 권력. 일상적으로 안 전 지사가 수행원들과 맺은 업무관계는 권위적이었다. 공무수행이란 명목으로 수행업무라는 ‘일’은 공사, 시간, 장소 구분 없이 안 전 지사가 원하는 때와 방법으로 요구되었다. 그것이 수행원의 역할이자 역량으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물리적 폭력 없는 위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고용허가제로 사업주 동의 없이 사업장을 변경할 수 없는 이주여성이 사업주의 성폭력을 신고할 수 있는가? 거주시설 원장이 가해자인 경우 장애여성은 저항하기 쉬울까? 성별 권력은 수많은 불평등과 함께 작동한다.

정상적 판단능력은 개인들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이 아니다. 웃으며 거절해도,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서 보이는 난처함도 그것이 거절의 메시지임을 상대방이 받아들여야 한다. 결정권을 행사해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판단능력은 무용지물이다. 피해자의 판단능력이 아니라 거절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능력을 가해자들에게 질문해야 한다. 한편으론 장애인 피해자에게 판단능력 없음이란 기준을 쉽게 적용한다. 피해자다움에 장애를 대입시킴으로써 성적자기결정권의 ‘보호’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성적 주체성을 제한하고 차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자다움이란 요건을 갖춰야 보호법익이 작동된다. 피해자를 믿지 않고 피해자다움을 믿는다.

이미 기울어진 저울에 서서 시작된 재판. 가해자 편에서 피해자에게 질문하기를 중단해야 부당한 판결을 끝장낼 수 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나도록 사법부가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낮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성폭행 가해자인 스타 수영선수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애런 퍼스키 판사를 주민투표로 해임시켰다. 판사소환제도가 없는 한국에선 어려운 일이지만, 사법권력의 관점과 판단의 변화를 촉구하는 싸움이 적극적으로 필요한 시기다.

무엇보다 다시 태어나겠다는 안 전 지사의 말은 끔찍하다. 처벌과 반성 없이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권력과 권세를 가진 자들의 공모가 무죄를 만들었다.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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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었습니다. 27년 전, 고 김학순 할머니께서 강철보다 단단한 벽을 넘어 너무나도 어렵게 그러나 너무나도 당당하게 수많은 기자들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경험을 밝힌 날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운 남성의 성욕이자 여성의 숙명으로 여겨져 피해자가 감추어야 할 정조에 관한 죄일 때, 가문의 수치이자 민족의 수치로 손가락질당할 때, 바로 그 일이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군사주의가 공모한 어마어마한 성폭력 범죄행위임을 낱낱이 전 세계에 알린 그날이었습니다. 가족과 공동체, 국가가 모두 외면하던 시절, 피해자가 생존자로 다시 활동가로 거듭나면서 수많은 다른 피해자들의 손을 잡기 시작한 그날, 전 세계를 돌며 ‘거리에서, 강연장에서, 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알리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던 그래서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성폭력과 강간캠프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 인권규약을 다시 쓰기 시작했던 그날, 그 정신을 기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국가기림의 날로 지정된 그날, 대통령이 “우리 자신과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가 전체 여성들의 성폭력과 인권문제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성과 교훈으로 삼”자고 강조한 그날, 대한민국은 당사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빚졌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선언한 그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고, 성폭력과 여성인권에 대해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뻔뻔하게 선언했습니다. 사회적 타살을 감내하며 어렵게 나온 피해자들의 입을 다시 봉하는 판결을 감행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충남 천안시 국립망향의동산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날’ 첫 정부 기념식을 마친 뒤 피해자인 김경애 할머니에게 인사하자 김 할머니가 문 대통령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날은 코소보, 예멘, 우간다, IS 성폭력 생존자들이 기림일을 맞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가 개최한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해 각자의 경험을 증언하고 손잡던 날이었습니다. 생존자들이 나서서 조직적 성폭력의 의미를, 현실을, 그 참혹한 결과를 알리고 저항하며 세상을 바꾸자고 결의하던 날이었습니다. “한국의 강인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분들은 저희의 영웅이십니다. 견디기 힘들고, 가슴이 찢어질 듯하고, 끔찍하고, 고문과 같고, 위안이 되기 어려운 아픔과 함께 살아야 하는 절망의 깊이 속에서도 여러분들은 저희에게 영감이 됩니다”라고 말하며 연대를 다지던 그날, 증거를 인멸하고, 피해자들에게 입증을 요구하고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발뺌하고 피해자의 행실과 자격을 묻고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심지어 없었던 일, 꾸며낸 일, ‘거짓말쟁이’ ‘더러운 ○○’라며 온갖 욕설과 수치심을 안겨 준 가해자들, 그리고 그 옹호자들과 힘겹게 싸워온 지난 세월을 서로 나누던 그날,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김복동 할머니께서 여성들의 ‘광복’과 명예회복의 의미를 다시 확인시키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당신들은 피해자를 피의자로 완벽히 둔갑시킨 판결문으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위력의 존재와 위력의 행사를 구분하며, 피해자의 행실을 의심하고 증언의 신빙성을 따지는 최악의 2차 가해로 전 세계 용감한 생존자들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거리에 나섰습니다. 단순히 안희정씨 사건의 재판관들에게 항의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가해행위, 편파수사, 편파판결, 편파보도를 규탄하려 모였습니다. 불법촬영·유포·소지·방조자들과 웹 하드 업체, 쾌락산업이란 명목으로 일상적으로 여성 몸을 거래하는 자들에 대한 공정한 수사와 처벌, 여자 화장실마다 뚫려 있는 ‘구멍’들의 실체 규명, 포털 사이트 댓글만 봐도 접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끔찍한 욕설과 비방에 대한 반성과 자제, #미투운동 이후에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는 무지하고도 공고한 남성연대체의 해산을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은 최근 페미니즘이 왜곡되고 과격하게 변형되었다고 말씀하시지요?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누구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다운 처우를 위해, 동등한 교육을 위해, 참정권을 위해, 보다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해, 동등하게 돌볼 권리와 책임을 위해, 질 좋은 공보육 시설을 위해, 재생산의 정의를 위해, 혼자든 누구와 함께하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거리에서 안전할 권리를 위해, 매 맞지 않기 위해, 강간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특정한 집단이나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기 위해 군사훈련을 한 적도 가스실을 설치하거나 생체 실험을 하거나 집단 강간소를 만든 적도 없습니다. 페미니즘 때문에 누가 일상이 두렵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다치고 강간당하고 죽었습니까. 무엇이 과격하고 위험한지요. 공정한 판단, 공정한 수사, 공정한 판결, 공정한 취재가 어렵다고 한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입니다. 광복 73주년,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촛불혁명 2주년 이후에도 여성들에게 해방과 정의는 오지 않았습니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습니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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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나는 4·3 발발 70주년 관련 행사 때문에 제주에 있었다. 공항에서 생활정보지를 집었는데, 어느 시인이 쓴 ‘거리의 복면가왕’이라는 글이 놀라웠다. 올레꾼의 복면(覆面) 복장을 비판하는 글인데, 마지막 부분이다.

“스페인에서는 마스크를 쓰면 나병 환자 취급을 한다고 들었다. 오스트리아는 공공장소에서 부르카를 비롯하여 얼굴을 가리는 복장을 법으로 금지한다.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산다지만 보는 이들이 혐오감을 느낀다면 삼가는 것이 미덕 아닐까.”(‘교차로’ 6월25일자, 5569호).

일단, 위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유럽에서 한센병 환자를 경원시하는 문화는 구약성서의 영향 때문이고, 복면 금지는 KKK단처럼 약자를 린치하는 집단을 단속하기 위해서였다. 부르카 금지는 보는 사람의 혐오감 때문이 아니라 착용 여부에 대한 여성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게 인권의 보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도 얼굴을 가린 이들을 보면 답답함을 느끼지만, “복면이 싫다”는 판단 기준이 왜 유럽 사례여야 할까. ‘우리는’ 이슬람을 얼마나 아는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들이’ 핍박받는 이들이든 악당이든 한국인은 서구의 시각(인종주의)을 통해 그들을 본다.

예멘은 2015년 시작된 내전으로 인구의 70%인 2000만명이 식량 부족 상태이며 자국을 떠난 이들은 19만명에 이른다. 이들 중 500여명이 제주에 왔다. 이 글에서 난민에 관한 근본적인 논쟁이나 구체적인 대책을 논할 수는 없다. 다만,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고 외쳤던 이들이 “난민보다 더 어려운 우리 국민이 있다”고 말할 때, 일부 여성이 “예멘 남성으로 인한 한국 여성의 성폭력 공포”를 주장하며 “재사회화” 대책(?)을 제시하는 현실이 당황스럽다. 타인의 정체에 대한 확신에 찬 규정과 머릿속의 ‘처리’ 방식까지 마음껏 발화하는 것. 이것이 혐오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 근대 초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페미니즘 슬로건이다. ‘여성’과 ‘국가’. 둘 중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는 여성의 현실을 해석할 수 없다. 여성은 젠더와 민족, 모두로부터 억압받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넘는 횡단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이나 ‘적국’인 팔레스타인 여성과 이스라엘 여성의 평화 연대가 좋은 예이다.

문화인류학자 김현미는 난민 중에서 여성과 어린이만 받고 남성 난민은 재사회화시키자는 주장은 여성 연대와 무관하다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초국적 남성 지배 문화를 드러내지 못하며, 무엇보다 한국 남성의 문제를 은폐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다인종 국가다. 홍세화는 묻는다. 백인과의 관계는 ‘글로벌 라이프’,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다문화’인가? 

이주민 여성운동가인 정혜실은 “어떻게 페미니즘을 앞세워서 또 다른 소수자인 난민을 억압할 수 있는가. 분노하다 못해 절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페미니즘 일각의 성 소수자 혐오가 난민 혐오로 넘어왔다고 본다.

난민 이슈가 중요한 이유는 수용 여부 자체‘보다’, 한국 사회 내부의 차별과 순혈주의 망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난민 반대”는 자본주의의 절대 지배 속에서 누가 더 약자이고 더 고통받는가를 경쟁하는 비극의 정치일 뿐이다. 난민과 성폭력을 연결시키는 사고는 무지 혹은 의도된 오식(誤識)이다. 1970년대부터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서구가 비서구 사회의 야만성을 부각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성의 ‘열악한’ 인권 이미지를 활용해왔음을 강력하게 비판해왔다. ‘서구 선진국’에도 여성에 대한 폭력은 넘쳐난다. 양상이 다를 뿐이다.

성폭력은 오래된 범죄다. 전 세계적으로 가해자의 70~80%가 아는 사람이며, 그들의 30%가 친·인척(가족)이다. 범죄 장소도 가해자나 피해자의 집이 80%다. 피살자가 여성인 경우, 범인의 60% 이상이 남편이나 파트너다. 즉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제1의 세력은 (난민이 아니라) 가까운 남성들이다. 물론 모든 남성이 가해자도 아니고 모든 여성이 피해자도 아니다. 문제는 젠더가 다른 사회적 구조와 결합하여 성폭력 공포가 조성되는 방식이다. 권력은 무엇이 가해이고 아닌지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지, 페니스가 아니다. 흑인, 난민, 노숙인은 쉽게 가해자로 간주된다. 현실은 다르다. 미투 운동에서 보았듯이 예술, 학문, 종교계의 성폭력이 더 교묘하고 만연해 있다. 조직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남성 주도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한국 여성 보호=난민 반대”와 “난민이 못된 한국 여성을 강간해야=난민 찬성” 입장이 싸우고 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왜 ‘난민은 남성’으로, ‘한국인은 여성’으로 대표되는지 질문한다. 한국 남성은 한국인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가? 집단의 성별적(性別的) 재현. 이는 난민을 위협 세력, 침략자로 만드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한국 남성이 이주여성에게 자행해 온 폭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난민은 ‘우리’의 거울이다. 수용이나 혐오 등 차이에 대한 태도는 민주주의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자국민 우선? 아니, 누가 자국민인가? 도처의 양극화를 보라. 어느 사회 내부도 균질적이지 않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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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감추어졌던 여성에 대한 폭력의 역사가 진실의 햇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또 다른 피해자의 목소리와 이어지며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견고한 장벽을 조금씩 흔들고 있다. 모든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 관계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오랜 시간 동안 뿌리내렸던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인 권력구조가 가해자에게 압도적인 권력을 주었고, 피해자인 여성에게는 침묵을 강요해왔다. 지금 드러나는 수많은 폭력이 오랫동안 은폐된 가장 큰 이유다.

같은 이유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피해자가 여기에도 있다. 한국에 머무는 많은 이주여성이다. 얼마 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실시한 ‘이주여성 농업노동자의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12.4%가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변했다. 농촌 노동의 특수한 문제는 아니다. 식당, 공장에서도 여성 이주노동자에 대한 성희롱, 성폭력은 빈번하다. 혼인이주 여성의 성폭력이 동반된 가정폭력도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에는 외국인 유학생에 대한 성폭력 사건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을 지지하고 성평등 실현을 촉구하는 집회와 행진을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특히 이주여성들은 공장, 가정, 학교 등 공간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외부기관의 조력을 받기 쉽지 않다. 또한 성폭력 피해에 대처할 정보가 충분하지 않고, 무엇보다 한국어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져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주여성들이 언어의 부담 없이 자국어로 소통하며 자신의 피해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고 이에 대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통합 지원 기관의 설립과 경찰·검찰·법원의 사법적 지원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후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처음부터 이주여성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이다. 우리나라의 출입국 정책에 따르면 이주여성은 너무도 취약한 지위에 놓여 있다. 한국 사람과 결혼한 이주여성은 매번 자신의 체류자격을 연장하려면 한국인 남편이 함께 출입국관리소에 동행해야 한다. 두 사람이 진정한 결혼생활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심사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진정한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정부 기관이 심사한다는 것도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이러한 심사를 처음 혼인신고 이후에도 매년 반복해야 한다. 이주여성이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해도 “신고하면 출입국관리소에 같이 안 가준다”는 말 한마디에 수년 동안 피해를 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일터에서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지금의 제도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사장이 외국인 노동자의 체류자격을 사실상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외국인 노동자는 사장이 싫어도 사업장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예외적인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사장의 허락 없이 사업장에서 이탈하면 그 순간 ‘불법체류자’가 된다. 사장이 가진 권한은 막강하지만, 책임은 거의 없다. 제대로 된 잠금장치도 없는 낡은 비닐하우스가 이주여성 노동자의 숙소이며, 그마저 사장은 여성 노동자의 숙소를 제멋대로 들락날락한다. 이런 숙소를 제공하고 월급에서 매달 20만~30만원씩 깎는다. 고용노동부 지침에 따른 것이라니 할 말이 없다. 이런 취약한 상황에 놓인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사장의 온갖 성폭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한 인간이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정부에서 만든 제도가 이주여성을 열악한 사각지대로 밀려날 수밖에 없게 만든다면,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지속해서 은폐될 수밖에 없다. 어떠한 법과 제도도 사람을 누구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뒤늦게나마 그동안 감추어진 여성들에 대한 폭력의 역사를 햇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게 한 위대하고 용감한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 가장 취약한 어느 곳에서 눈물 흘리는 피부색 다른 이주여성에게도 울림으로 이어지길 희망한다.

<조영관 |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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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_내_성폭력 1차 파동이 일던 2016년 가을, 한 여성 평론가에게 물었다. “요즘 문단 분위기 어떻습니까?” 매우 신중한 성격인 그녀는 약 5초간 침묵하다가 “문단이란 걸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단호한 말이 나오는 걸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어린 고교생 작가 지망생까지 성폭력의 희생자였음이 드러난 때였다.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검찰 내 성폭력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없앨 수도 있고 없앨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제도로서의 문단은 등단과 문학상, 문예지와 문학가 단체 등을 아우른 체계를 뜻하고, 비물질적인 측면에서 문단이란 문인들의 네트워크, 또 비평적·예술적 규범과 권위로 이뤄진 무정형의 공동체 같은 것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인 문예지를 운영하는 출판사와 그 주변의 작가·비평가가 문단의 중심에 서 왔다. 그리고 이 땅 문단에서는 근대문학의 이념과 제도가 발생하던 20세기 초부터 술자리가 중요했다. 이는 한국 사회 어디에나 있는 그 술자리의 문학판 버전이기도 하다. 거기서 친분과 인맥이 생겨나며, 청탁과 거래가 오가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큰 출판사들은 의식적으로 많은 돈을 쓰며 지식인·문인들에게 공짜 술을 샀다. 고담준론이나 지적·예술적 교류가 오간 것도 사실이니, 좋게 보면 술자리는 문학계의 자율성과 연동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자리들에서 권력의 네트워크와 권위를 악용한 성폭력도 자행돼온 것이다. 성폭력범은 소수라 해도 이런 문화 자체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이어져왔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2015~2016년의 표절·성폭력 스캔들을 겪고 문단의 제도와 네트워크는 부분 개혁되었지만, 권위와 존경은 근저에서 깨져나가고 있어 안타깝다. 필자가 다니는 대학 문학 동아리의 한 남학생은 모 원로 소설가를 일컬어 ‘고마운 개새○’라 했다. 노회한 상습범이 젊은 영혼에게 충격적 깨달음을 준 것이다. 그는 남성인 자기에게 모호하던 많은 문제가 사태로 인해 분명해지고, ‘여성의 처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고 했다.

저렇게 심각했던 1차 파동 때에 문단의 호스트이자 ‘권력’이었던 ‘어른’들은 마치 아무 일 없는 양 하거나 침묵했다. 그리고 며칠 전 어느 ‘원로’는 다시, ‘작품과 작가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된다’거나 ‘예술가들의 업적은 존중하되 그 약점이나 실수는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원로’나 일부 비평가들은 이런 사태로 인해 자신들이 쌓아온 ‘공적’이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힌 모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 많은 피해자들과 젊은 문학인과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가해자 또는 방조자됨을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예술적’ ‘공적’의 일부라도 한국문학 교실에서 가르칠 수 있다.

사실 이미 한국문학사는 ‘불구하고’(일본어투라지만 문맥상 양해를)가 되었다. 표절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이 훌륭하다, 일본을 위한 전쟁에 죽으라 선동했음에도 소설은 좋다, 이승만·박정희가 한 모든 일과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모국어의 마술사다, 상습 성추행범이었음에도 뛰어난 예술가며 민족 시인이다. 이런 한국 현대문학사란 도대체 무엇일까? ‘문학이라는 질병’(‘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엘리트들의 체제 순응과 남성 동맹’이라는 부제가 붙은 다카다 리에코의 책 제목에서 빌림)은 또 얼마나 독한 것인가?

이번에 상습범으로 지목된 시인은 1970년대에 이문구·백낙청 등과 함께 야만적 유신독재뿐 아니라, 어용화된 서정주·조연현 등의 문인협회와 싸워 한국문학의 기풍과 정신성을 바꿨었다. 그 싸움과 정신의 중요 구성부분을 ‘민족문학’이라 경칭해왔다. 민족문학은 식민 지배와 내전, 분단을 겪은 가련한 한반도 종족과 민중의 문화 이념이자 운동이었다. 그런데 민족문학은 민주화의 부분 성공과 문단 헤게모니의 교체 이후에 주류·정통의 자리에 놓였다. 바로 거기서 많은 모순과 불행이 배태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계속 가장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명되었던 것은 민족문학의 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최영미 시인이 경험한 폭력은 1990년대 민족문학의 제도적 구현체와 직간접 관계가 있다. 폭로 이후 SNS에서 2차 가해성 글을 쓴 또 다른 시인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활동가였다 한다. 이념과 운동으로서의 민족문학은 21세기에 들며 자연사하다시피 했는데, 이렇게 또 스스로 면류관을 벗고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다.

그럼에도 이 지구에는 한국어로 생각하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짓는 사람들이 여전히 몇 천만명이니, ‘민족의’ 문학이나 한국어 문학은 또 이어질 것이다. 새로운 공동성과 규범이 절실하다. ‘문학이라는 질병’을 넘는 문학인의 네트워크나 문화가 곧 도래할 것이다. 여성들과 젊은 세대가 할 것이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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