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에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방법은 증거 내밀기다. 발뺌하거나 다그치면 “증거 있어? 증거 대 봐”라고 방어하거나 공격한다. 증거가 없을 거라는 자신감에 찬 오리발이지만 막상 증거를 내밀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법정다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관계를 확정하려면 물증도 필요하고 증인도 불러 신문해야 한다. 모든 분쟁은 증거싸움이다. 아무리 진실이라도 증거로 증명하지 못하면 그 진실은 인정받지 못한다. 범죄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죄판결이 난다. 그래서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증거 수집에 열을 올린다. 때로는 증거를 인멸하기도 한다. 미행하거나 몰래 엿듣기도 하고 흥신소의 도움도 받는다. 불법으로 도·감청하고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거나 위치추적기를 달기도 한다. 증거를 시멘트 바닥에 파묻기도 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현금 가방을 건네기도 한다. 증인과 입도 맞춘다. 올 들어 적폐청산 수사 때문이었는지 압수수색 건수가 대폭 증가했는데, 수사기관은 물증확보 수단으로 압수수색영장을 활용하고 있다. 휴대전화와 이메일도 들여다보고 금융계좌도 추적한다. 자백이 증거의 왕이었던 시절에 비하면 압수수색의 비중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로는 영장 범위를 넘어서 포괄적으로 압수수색하기도 하고 압수수색으로 얻은 증거로 영장에 적힌 혐의와는 다른 별건의 범죄에 대한 수사를 하기도 한다. 증거로 유무죄가 판가름 나니까 증거수집에서 불법의 선을 넘어설 유혹을 느끼는 것이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기소 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5월29일 오전 공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증거가 없으면 아무리 정황이 확실하고 심증이 있어도 무죄가 될 수밖에 없다. 증거재판주의다. 증거라고 다 증거로 인정되지 않는다. 유죄를 입증할 스모킹건이라도 위법하게 손에 넣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는 증거의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위법수집증거 배제법칙이다. 영장을 발부받지 않고 압수수색해 찾아낸 물증이나 진술거부권을 고지하지 않고 받은 자백은 증거로 제출되어서도 안되고 증명의 자료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지 않고 수집된 증거는 기본적 인권보장을 위해 마련된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않은 것으로서 원칙적으로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증거법의 대원칙이다. 도지사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수사하던 검찰이 도지사 집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고 때마침 들어온 도지사 비서관의 업무일지를 압수한 사건에서 그 업무일지에 도지사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압수범위를 벗어난 위법수집 증거라는 이유로 증거능력을 부정한 200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전환점이다. 아무리 진실발견이 형사소송의 목표라 하더라도 적법절차의 원칙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는 취지다. 특이한 점은 이 판결에서 당시 대법관이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다수의견이 위법수집증거 배제법칙의 기준을 너무 엄격하게 제시하고 있다면서, 증거수집 절차의 위법사유가 영장주의의 정신과 취지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에 한해 그 증거능력을 부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별개의견을 개진했다는 점이다. 지금 사법농단 재판의 피고인으로서 권한남용 혐의의 증거가 들어있는 이동식저장장치(USB)의 압수수색이 위법하다고 주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법관 시절의 입장에 따르면 증거능력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한창 진행 중인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재판에서 핵심 피고인들은 검찰의 압수수색의 적법성을 치열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양승태 피고인을 비롯한 고위 법관 출신 피고인들은 압수한 USB 등이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라며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저장장치에는 범죄사실과 관련된 엄청난 파일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증거능력 인정여부가 사건의 핵심쟁점이다. 양승태 피고인의 재판부는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는 절차에서 어떤 위반 행위가 없던 것으로 보인다며 피고인의 주장을 배척했다. 최근 여러 재판에서 위법수집증거 배제법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무죄판결을 내리고 있어 대법원 판례에 따른 당연한 결론이지만 사법농단 재판의 방패막 판결이자 방향제시일 수 있다는 지적이 검찰을 긴장하게 했었다. 어떤 항소심 재판부는 별건수사에 활용한 위법한 압수수색 관행의 근절을 힘주어 말했다고 한다. 재판부의 보도자료 배포가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증거법 대원칙이기는 하다. 피의자 피고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적법절차의 원칙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위법수집 증거의 배제법칙은 법원이나 검찰 모두 법치국가 형사소송절차에서 지켜야 할 철칙이다. 실체적 진실발견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적법절차의 원칙 아래 형사사법 정의의 실현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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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검찰은 300페이지에 달하는 공소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공소사실은 무에서 무일 뿐입니다. 저는 공소장에 대응해야 합니다. 무소불위 검찰과 마주서야 합니다. 하지만 제게 무기라고는 호미 한 자루 없습니다. 재판은 재판입니다. 공평과 형평이라는 우리 형사소송법 이념이 지배하는 법정이기를 바랍니다. 실체적 진실이 발견되고 형사소송법 원칙과 이념이 구현되는 법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보석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에서 말했다. 

그러면서, 영민하고 사명감에 불타는 검사 수십명이 만든 공소사실에 대응하려면 사건을 잘 아는 당사자가 불구속으로 재판받아야 한다고 했다(하지만 보석은 기각됐다). 이렇듯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혐의를 다투기에 앞서 소송법 원칙을 설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검찰이 공소장일본주의(一本主義)를 위반했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공소를 제기할 때 공소장 하나만 제출하라는 원칙이다. 판사와 배심원에게 예단을 주는 서류를 첨부하거나 그 내용을 인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소장에 법령이 요구하는 사항 이외 사실을 적어 법원에 예단이 생기게 하는 것도 금지된다. 

공소장일본주의가 무엇인지 대법원이 가장 치열하게 논쟁한 판결이 문국현 사건이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자 검찰은 낙선한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를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혐의와는 무관하지만 기업인 출신인 문국현 후보는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가 부도덕하다고 비판했었다. 검찰은 공소사실과 관계도 없고 입증도 되지 않는 내용을 산만하게 공소장에 적었다. 이 정도라면 소송법에 따라 공소기각을 해야 한다고들 했다. 2009년 대법원이 문국현 사건을 선고했는데, 공소기각 의견을 김영란, 박시환, 김지형, 전수안 대법관이 냈다. 

그러나 주심 신영철 대법관을 비롯한 나머지 대법관들이 “1심에서 문제제기해야 했다”며 유죄를 확정했다. 신영철 대법관의 문장은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은데 이때도 다르지 않았다. 요약하면 공소장일본주의 위반이 맞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내용이다. 이런 애매한 다수의견을 보충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양승태 대법관이다. “공소사실을 특정하려면 그 배경과 과정을 자세하게 기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양승태 대법관은 2011년 대법관에서 퇴임해 같은 해 대법원장이 된다. 임명자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공소장일본주의에 관한 양승태 대법관의 보충의견은 이렇다. “사안이 복잡하거나 범행 수법이 교묘한 경우 또는 상황적 요소에 의해 범죄의 성립 여부가 좌우되는 미묘한 사안에서는 범행에 이르는 과정이나 그 배경 등 전후의 정황에 관한 설명 없이 단순한 범죄구성요건에 직접 해당하는 행위만을 기재하여서는 공소사실을 완성도 높게 특정할 수 없다. 이러한 경우 범행의 동기, 배경, 과정, 기타 정황적 사정을 필요한 범위에서 기재하는 것은 형사공판 절차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진행 과정이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은 양승태 대법관은 피고인에게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에 의해 심판의 대상이 특정됨과 동시에 입증의 대상과 심리의 방향도 정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기재는 오히려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를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렇게 결론 냈다. “공소장의 기재 내용은 필연적으로 증거로 확보되어 있는 내용의 축약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인바, 증거에 의한 입증을 증거의 인용과 혼동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의견이 법정의견이었다면 공소장일본주의는 사실상 폐기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형사법정은 검사의 놀이터, 판사의 휴게실, 전관의 영업장이다. 검사는 정의감으로 포장된 출세욕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털어대고, 판사는 복잡한 기록만 들춰도 전문가 소리를 듣는 민사담당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전관은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된다며 거액을 뜯어낸다. 국회와 언론도 다르지 않다. 국회는 작은 사건만 생겨도 형량을 올려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었다. 언론은 삼류 수사관이 되어 혐의를 인정하라고 피의자를 윽박지르고, 피의사실공표죄의 도구가 되기를 애원한다. 

형사재판에 쓰이는 판례·법률 가운데 제대로인 게 드물다. 전문증거에 불과한 검사의 피의자신문조서에 증거능력이 있고, 이런 피의자신문에 묵비하면 구속영장이 발부된다. 일제가 본토에서도 안 하던 제도를 식민지 조선에 심었다. 해방 뒤에는 친일파 법률가들이 군사정권에서 유지했다. 피고인 양승태는 대법관 양승태와 싸워야 한다. 공소장일본주의 정도는 만만한 상대다. 그보다 강한 대법관 양승태들이 기다리고 있다. 피고인 양승태가 대법관 양승태를 이기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한다. 지금은 호미 한 자루 없지만 결국 밭을 일구고 인권을 전진시키리라 믿는다. 아이러니지만 역사란 이런 것이다. 양승태, 양승태를 이겨라.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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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가장 큰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의 소장 판사들이 지난 15일 회의를 열고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대법원의 사법개혁 저지 의혹과 관련해 전국법관대표회의 개최를 요구했다. 독립성이 강하고 판사 개개인이 독립기관이나 다름없는 단독재판부 소속 판사 91명 가운데 53명이 참여했다. 앞서 지난 4월 말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들의 회의 이후 전국 18개 법원에서 11번의 판사 회의가 열렸다. 판사들은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과 법관들의 자유로운 학술활동에 대한 침해는 신뢰받는 사법부를 만들기 위해서 결코 있어서는 안될 심각한 사태”라고 양 대법원장을 비판했다. 양 대법원장의 사퇴를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사법부 수장을 탄핵한 것이나 다름없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2일 차에서 내려 대법원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김영민 기자

사법파동으로 번진 이번 사태는 양승태 사법부의 농단에서 비롯됐다. 판사 통제를 목적으로 한 권력자의 부당한 지시와 증거인멸, 블랙리스트 운용 등 박근혜 게이트에서 발생한 모든 일이 사법부에서 똑같이 일어났다. 법원행정처를 통해 판사들의 학술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다 들통난 것이 발단이지만 자체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를 꾸려놓고도 결국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사법부의 자정 능력이 한계에 달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양 대법원장은 지금껏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일부 진보 성향 판사들의 사법부 흔들기라는 식으로 되레 물타기를 시도했다.

요즘 대법원은 이상훈·박병대 대법관 후임 선발을 위한 대법관 제청 작업을 벌이고 있다. 대법관은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충실히 보장하는 사법부의 최고 요직이다. 사회의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아울러 사회 갈등을 해소하고 시민 통합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대법관 임명의 제청권을 사법농단의 장본인인 양 대법원장이 행사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양 대법원장의 임기는 오는 9월까지다. 그러나 임기에 연연할 상황이 아니다. 양 대법원장 스스로 거취를 정하지 못한다면 타의에 의해 이뤄질 수 있다. 대법원장 인사권과 법원행정처 권한 축소 등 대법원 개혁 작업도 양 대법원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외부 힘으로 강제될 수밖에 없다. 시민의 신뢰를 상실하고 후배 판사들의 신임까지 잃은 사법부 수장이 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 양 대법원장은 고민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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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사법개혁 저지 의혹을 조사한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가 지난 18일 내놓은 보고서는 사법부의 자정 능력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일선 법관들과 시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사태를 축소·은폐하기 위한 꼼수로 진상조사위 카드를 사용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진상조사위는 고영한 법원행정처장과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이 개입한 정황을 확인했음에도 행정처가 조직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행정처 컴퓨터에 판사들 뒷조사를 한 파일이 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도 컴퓨터를 조사하지 않은 채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단정지었다. 양 대법원장을 조사했다면서도 무슨 내용을 묻고 어떤 답변을 들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전·현직 고위 법관 7명으로 구성된 진상조사위는 논리적 비약과 모순, 궤변으로 가득 찬 보고서를 내놓고도 “어떠한 편견과 예단도 갖지 않고 철저하고 엄정한 조사를 했고, 조사대상자들이 적극적인 태도로 조사에 응해 사실관계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대법원의 법관 탄압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발표된 18일 양승태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ㅣ연합뉴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이다. 행정처를 통해 판사들의 학술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다 들통난 것이 발단이다. 이 과정에서 행정처 소속 판사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리고 해당 판사가 지시를 거부하고 사표를 내자 부임 2시간 만에 지방법원으로 인사 복귀 조치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법관 인사는 대법원장 전권이고, 특히 행정처로 발령난 판사를 되돌리는 인사를 대법원장이 모를 리 없는데도 양 대법원장은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대법관인 고영한 행정처장은 “해당 판사에게 연구회 활동과 관련하여 어떠한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거짓 해명까지 했다.

권력자의 부당한 지시와 증거인멸, 보복 인사, 블랙리스트 운용 등 박근혜 게이트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판사 통제 목적으로 사법부에서도 재연됐다. 법관의 인권을 침해하고 재판의 독립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반민주적·반헌법적 행위를 했다면 대법원장 탄핵 사안이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사법부 내 헤게모니 다툼인 양 물타기하고, 일부 진보 성향의 판사들이 양 대법원장을 흔들기 위한 것이라는 식의 여론전을 펴고 있다. 거짓 해명과 사실 은폐로 사건을 키우는 사법부의 모습이 6개월 전 국정농단 사건 초기 청와대와 닮은꼴이다. 진상조사위의 부실 조사로 이번 사태를 사법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 국회 국정조사 등을 통해 진상을 규명하고 사법 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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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판사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인사자료 등으로 활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실이라면 박근혜 게이트에 버금가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판사들의 진술은 매우 구체적이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김모 전 심의관 컴퓨터에 대법원 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동향을 정리한 일종의 사찰 파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찰 파일에 관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대법원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법원행정처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해 발령 2시간 만에 행정처에서 인사조치당한 ㄱ판사는 이 파일 관리 업무도 맡으라고 지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판사 블랙리스트는 과거에도 설이 무성했다. 게시판 글이나 판결 등을 분석해 법관 인사나 연수자 선발 때 활용한다는 것이다. 판사들의 학술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설문조사에서 법관의 88.2%가 대법원장 등의 뜻에 반하는 의사표시를 했을 때 보직 등에서 불이익이 우려된다고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4월 7일 (출처: 경향신문DB)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판사 블랙리스트는 법관의 인권을 침해하고 재판의 독립성을 거스르는 반민주적·반헌법적 행위다. 국민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침해한다. 대법원이 판사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운용한 것이 확인되면 양승태 대법원장이 이끄는 사법부는 탄핵이 불가피하다. 양 대법원장 등 법원 수뇌부는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아야 한다. 존재 여부를 떠나서 판사 블랙리스트가 거론된 것 자체가 사법부엔 치욕이다. 그러나 대법원의 사법개혁 방해 의혹을 조사 중인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는 블랙리스트 관련 진술을 판사들로부터 확보하고도 쉬쉬하면서 의혹 규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진상조사위원회는 블랙리스트 파일이 있었다는 컴퓨터를 당장 확보해 디지털 포렌식 등으로 복원하고 정밀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의혹의 중심에 있는 양 대법원장도 직접 조사해야 한다. 대법원이 법원행정처를 통해 벌인 판사 통제 작업의 실체가 이번 기회에 낱낱이 드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회나 검찰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 최선은 지금이라도 양 대법원장이 진실을 밝히고 사죄하는 것이다. 양 대법원장과 사법부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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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일선 법관들의 사법개혁 요구를 막기 위해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에게 압력을 가하고, 판사들의 학술 모임을 와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다 들통났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대법원은 해당 판사가 지시를 거부하자 부임 2시간 만에 지방 법원으로 인사 조치까지 했다. ‘국정농단’ 사건에서 드러난 권력자의 부당한 지시와 증거인멸, 보복 인사 등이 사법부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발단은 판사 480여명의 학술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사법개혁을 위해 전국의 법관 2900명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다. 설문에는 법관의 독립성 보장,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 재판의 공정성 등에 관한 질문이 포함됐다. 그러자 대법원은 법원행정처로 갓 발령이 난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 판사에게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것을 막고,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축소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성을 상실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부당한 지시에 판사가 반발하자 대법원은 그를 직전 소속이었던 지방 법원으로 다시 인사 발령을 냈다. 문제가 불거지자 대법원은 “해당 판사에게 학회 행사 축소 관련 지시를 한 사실이 없으며, 해당 판사가 법원행정처에 부임한 바 없다”고 거짓 해명했다.

2월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전담법관 임명식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이 식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대법원은 이날 이백규(53·사법연수원 18기)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와 주한길(53·24기) 변호사(서울서부지법 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를 신임 전담법관으로 임명했다. 전담법관은 특정 사건 재판만 맡는 법관으로 15년 이상 법조 경력자 중에서 선발한다. 대법원은 2013년부터 매년 3명씩 소액사건 전담법관을 임명해 전국 5개 지방법원에 배치했다. 연합뉴스

대법원 행위는 파렴치하기 그지없다. 학문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침해해 헌법에도 위배된다. 이 같은 행위를 묵인하거나 조장한 이는 다름 아닌 양승태 대법원장이다. 법관 인사는 대법원장 전권이고, 특히 법원행정처로 발령난 판사를 되돌리는 인사를 대법원장이 모를 리 없다. 양 대법원장은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강요해 법관의 인권을 침해하고, 사법개혁을 방해해 사법부 수장으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이번 사태는 인사권을 무기로 법관들의 개혁 요구에 재갈을 물리는 ‘양승태 사법부’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대법원이 판사들을 이처럼 쉽게 여기는데 이들이 진행하는 재판이 사법부 수뇌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이뤄질 리 만무하다.

그렇잖아도 한국의 사법 신뢰도는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5년 보고서를 보면 ‘사법제도를 신뢰한다’는 한국인 비율은 27%에 불과하다. OECD 34개 회원국 중 33위다. 국가권력의 한 축인 사법부는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나 입법부를 구성하는 국회의원과 달리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사법부의 민주적 운영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시민의 신뢰를 상실하고 대법원을 복마전으로 전락시킨 사법부 수장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양 대법원장은 자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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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이 국가정보원의 사찰을 받았다는데 3000명에 달하는 판사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법원 게시판도 조용하고 판사들 사이에 화제도 아니다. 전직 대법원 고위 관계자는 “양승태 원장이 업무시간에 등산 갔다는 내용이잖아요”라고 심드렁히 말했다. 이렇게 되니 “실로 중대한 반헌법적 사태”라는 헌정사상 가장 강경한 성명을 읽은 대법원 공보관만 무람한 처지가 됐다.

정권의 간섭에는 어김없이 저항해온 다섯 차례 사법파동은 우리 법원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권력에 순종하고 협력해온 검찰은 흉내조차 내본 적이 없는 일이다. 이런 사법부의 수장이 ‘실로 중대한 반헌법적 사태’를 선언하는데도 판사들은 냉담하다. “사생활을 들춰낸 것도, 재판의 결론을 알아낸 것도 아니다. 업무시간에 등산을 갔다는 것뿐이다. 대법원도 예상한 수준 아니냐”고 판사들은 말했다.

나는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법원에 출입했는데 그때도 법원 담당 국정원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공보관도 만나고 법원장도 만나 돌아가는 얘기를 들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들과 정보를 주고받던 시절이 있다. 최근에는 판사들이 국정원의 사상검증을 거쳐 임관한다. 양승태 대법원은 대수롭지 않다고 반응했었다. 등산 문제로 발끈하는 대법원장이 그래서 어색한 것이다.

국회 청문회 도중 불거진 대법원장에 대한 사찰 의혹이 알려진 15일 양승태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퇴근하며 기자의 질문을 받자 손사래를 치고 있다. 정지윤 기자

판사들은 속내를 털어놨다. “이미 한참 전에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수첩이 공개됐다. 청와대가 판사들을 손보려고 벼른 사실이 드러났지만 말 한마디 없던 대법원 아니냐”고 했다. 실제로 법원행정처는 관련 법관 징계는 청와대에 영향받지 않았다는 동문서답을 대통령이 탄핵된 지난 9일에야 내놓았다. 정권의 판사 위협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대법원장의 순결만 주장하는 태도였다.

청와대의 표적들은 빠짐없이 고초를 겪었다.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무죄 판결을 비판한 김동진 판사, 선박 사고 영장을 기각하면서 세월호 사고와 국가의 책임을 언급한 이형주 판사, 국가보안법 사범에게 일부 무죄를 선고한 박관근 판사 등이다. 게으른 기자인 나는 모르는 사건들이 산처럼 많을 것이다.

판사들의 싸늘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대법원은 등산사찰 항의 성명에 이렇게 덧붙였다. “청와대 등에서 법원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였다는 의혹이 최근 제기된 바 있으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법원으로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청와대의 시도가 전달되지는 않았다며 이번에도 대법원장만 보위했다.

이런 대법원이 최근 대법원장의 강력한 인사권을 복원하는 인사 방침을 공식화했다. 역사를 되돌리는 일이다. 앞서 2010년 국회는 대법원장의 지나친 인사권을 해소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만들었다. 대법원장이 지방법원 부장판사 중 일부를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시키고, 이들을 다시 추려 대법관에 제청하면서 법관들을 줄 세우는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외부의 압력이 강해지자 2011년 대법원은 개혁 요구를 일부 반영해 개선안을 만들었고 올해로 시행 5년째로, 과도기였다. 그런데 양승태 대법원장이 퇴임을 열 달 앞두고 사실상 백지화한 것이다. 판사들은 자신들의 인사 문제라 발언을 주저하고 있으며, 행여 내년 2월 인사에 불이익이 있을까 숨죽이고 있다. 판사들에 대한 청와대의 위협은 외면하면서 이 와중에 제왕적 인사권을 회복했다.

“법관들은 정치권력도 두려워하지 않고 언론권력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관은 겁내는 것이 있는데 대법원장의 인사권”이라고 판사들은 말한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을 앞두고는 지방법원 부장판사들이 눈치를 보고, 대법관 제청을 앞두고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움직인다. 제왕적인 대법원장은 무오류의 대법원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모든 다른 의견들을 소멸시켜가고 있다. 이것이 2016년 겨울의 사법부다.

사회부 이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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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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