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엄마에게 남편이었고 아들이었고 가장이었고 대들보였다. 니가 엄마 꿈에 나타나서 나비가 되어 펄럭거리고 날아갔다. 다음 생에는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부모 만나서 다시 꽃피거라. 내 아들아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해라.”

수능을 마치고 친구들과 떠난 강릉 여행에서 황망하게 목숨을 잃은 서울 대성고 ㄱ군 어머니의 신문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눈물을 삼켰다. 삶의 무게를 덜어주던 아이의 죽음.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당한 어머니는 더 좋은 부모를 만나기를 기도했다. 아들은 사회복지학과 수시모집에도 합격했다고 했다. “아빠도 아프고 누나도 장애가 있어요. 그래서 사회복지사가 되어서 자기가 다 보살피겠다고 했어요.” 그 슬픔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지만 내 가슴은 그럼에도 너무 아렸다.

연말이면 다가올 내년 계획을 일부러라도 거창하게 그려보지만 올해는 그러지 못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크리스마스 때마다 울려 퍼지는 예수 탄생의 의미는 올해도 현실과는 멀기만 하다. 차라리 퇴근 버스길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듣는 멜로디 속 가사가 울적한 마음을 달래줬다. “내일은 더 낫겠지/ 그런 작은 희망 하나로/ 일어나 앞으로 나가/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

한때는 사회를 바꿀 것 같은 기대도 있었다. 내가 쓰는 기사에 ‘권력 주변’의 사람들은 즉각 반응했다. ‘내 작은 능력으로 큰 변화를 줄 수도 있겠구나.’ 기자가 됐음을 너무도 고맙게 여겼다. 더 가열차게 매섭게 기사를 쓰면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가 더 빨리 올 것 같았다. 그러나 20년 넘게 그 일을 하고 있지만 세상의 모습은 여전히 아니다. 세상은 그게 당연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게 나이 드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많이 사람들이 원하는 일은 왜 신기루처럼 아른거리기만 할까.

지난해 12월13일자 이 칼럼난에 현장실습에서 다쳐 사망한 당시 19살 이민호씨에 대해 썼다. “곳곳이 ‘세월호’이고, ‘구의역’이다. 소중한 아이들의 생명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SOS를 보내는 학생들을 우리 사회는 온전히 구할 수 있을까. 차별과 서열, 불평등이 고착화한 사회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맺었다.

19일 오후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안전한 사회를 위한 토론회'에서 태안화력 9·10호기에서 운송설비점검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고(故)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가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1년 후에도 비슷한 사고가 발생했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현장 점검을 하던 김용균씨는 스물넷 나이에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목숨을 잃었다. 2인 1조 근무 규정은 비용 절감이라는 원칙 아래 지켜지지 않았다. 발전소 측은 사고를 인지한 후 5시간 동안 경찰과 병원에 알리지 않고 대책회의를 했다고 한다. 원청업체인 한국서부발전은 사고 발생 닷새 만에 사과문을 냈다. 끼니를 때우기 위한 컵라면은 서글픈 유품으로 남겨졌다.

2016년 5월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숨진 19세 노동자 사고 때와 무엇이 달라졌나. 정치권과 정부는 누군가의 죽음이 있고 나서야 움직였다. 구의역 김씨의 사망 사고 뒤 ‘위험의 외주화’를 막는 법안들이 발의됐지만 국회는 이를 제대로 심사하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뒤 10개월이 지나서야 여야가 이를 논의한 것은 김용균씨 사망이 계기였다. 그나마 “용균이와 같은 아이들,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는 어머니 김미숙씨의 호소가 있었기에 ‘기업 경영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기득권의 저항을 헤쳐나갔다.

지난 9월 부산 해운대에서 만취운전자의 BMW 승용차에 치여 숨진 윤창호씨의 친구들은 음주운전 처벌 강화 법안을 석달 만에 이뤄냈다. 국회가 십수년간 못한 일이었다. 고인의 중·고등학교 동창부터 대학 친구 10명은 슬픔에 젖어있는 대신 행동에 나섰다. “어느 날 다 같이 침통하게 병원에 모여있는데, 누군가 ‘창호라면 이럴 때 당장 피켓 들고 국회를 찾아갔을 텐데’라고 한 게 시작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창호는 부당한 일, 억울한 일이 생길 때 좌절하기보다 그걸 변화의 계기로 삼을 사람이 분명하더라고요. 그러면 우리가 창호라면 했을 일을 대신 하자. 그렇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슬픔보다 행동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은 언제나 세상을 바꿔왔다. “지극히 평범한 그들의 일상과 노력이 비범한 세상을 여는 열쇠임을 다시 깨닫는 연말이다. 지금 당장 속단하기는 이를지 모르지만 헛된 죽음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안간힘, 잊히지 않도록 하겠다는 마음들이 모여서 변화는 시나브로 온다.”

※이 글은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한국일보, 프레시안, 중앙일보 등 주요 언론 매체의 기사들을 참고·인용하였습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또한 척박해지는 언론 환경 속에서 세상을 바꿀 사실을 찾아 현장을 누비는 기자들의 노고에 격려의 마음을 전합니다.

<박재현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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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17일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숨진 태안화력발전소 사고와 관련해 관계부처 합동대책을 내놓았다. 고용노동부는 태안발전소에 대해 사고 원인 조사와 함께 특별 산업안전보건감독을 실시키로 했다. 나아가 석탄화력발전소 12곳 모두 긴급 안전점검을 실시하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위험 설비 점검 시 2인1조 근무 등의 안전사고 방지책을 내놨다. 사고 재발방지 방안이 두루 열거됐지만 합동대책치고는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12월17일 (출처:경향신문DB)

정부 합동대책 발표문에는 ‘엄중한’ ‘고강도’ ‘특별’ ‘긴급’ 등의 수식어가 가득하다. 이번 사고를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특별하지도, 긴급하지도 않다. 2인1조 위험시설 점검은 정규직이 일하는 원청 사업체에서는 이미 시행 중인 근무 방식이다. 평상시 발전소에 대한 정기 안전점검이 이뤄졌다면 긴급 진단도 불필요하다. 정부의 백화점식 대책이 사후약방문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위험의 외주화’를 막을 근본적인 처방이 간과된 점이다. 전문가들은 김용균씨 사망의 근본 원인으로 위험하고 힘든 업무를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위험의 외주화’를 지목해왔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날 청와대 회의에서 “최근 산재 사망의 공통된 특징이 주로 하청 노동자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사실”이라며 ‘위험의 외주화’ 현상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도 공동발표문에 포함된 ‘위험의 외주화’ 대책은 “원·하청 실태 등을 조사하고 제도개선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겠다”는 한 문장이 전부다. 구체적인 방안도, 프로그램도 없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위험업무의 외주 금지법안 마련 등 ‘위험의 외주화’를 막을 근본 대책이 강구되지 않으면 제2, 제3의 김용균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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