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가 4년간이나 선수를 성폭행한 사건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놀랍고 참담하다는 탄식만 하기에는 선수들이 처한 인권 상황이 위중하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환호에 가려져 왔던 폭행으로 얼룩진 선수들의 일상은 피해 선수의 용기있는 ‘말하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체육계,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가 이 사건을 계기로 뼈저린 자성을 하고 두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촘촘한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이 사건의 원인을 제대로 짚어야 한다. 이번 사건을 조재범이라는 한 개인의 일탈행동으로만 봐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 역시 누군가에게는 보통의 가족, 친구, 동료였을 것이다. 이제 그는 성폭력 피의자로서 수사와 재판 과정을 거쳐 진상규명과 함께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반성은커녕 혐의를 부인하는 태도, 가족까지 나서 사제의 정을 강조하는 등의 2차 가해를 당장 멈춰야 한다. 

체육·시민단체들의 주최로 10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조재범 사건의 철저한 진상 규명 및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10년 전에도 체육계의 광범위하고도 심각한 폭력, 성폭력 문제가 불거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스포츠 분야의 폐쇄적 집단 문화, 운동 외에는 다른 진로가 봉쇄된 체육계의 구조 등으로 인해 피해자들이 나서지 못하는 점을 주목했다. 인권위는 스포츠 분야의 성폭력을 포함한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특별 인권상담 및 제보를 받고 전문가들로 하여금 조사·연구하게 했다. 아울러 지도자와 선수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실시하고 정책 제언을 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지금 똑같은 충격적 상황을 또다시 마주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9일 서둘러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지금까지의 성폭력 대책 실패를 인정하고 사과와 함께 향후 대책을 내놓았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로 영구제명 조치 대상에 강간뿐만 아니라 중대한 성추행까지 포함한다고 발표했다. 또 성폭력 등 비위 근절을 위한 체육단체 전수조사, 피해자 보호 강화, 선수촌 합숙훈련 개선 등 선수들이 안전하게 훈련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피해 예방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전혀 효과가 없었음을 문체부도 자인한 정책의 반복에 불과할 뿐이다.

젊은빙상인연대와 문화연대, 스포츠문화연구소, 100인의여성체육인,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18개 체육·시민단체들이 10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조재범 사건의 철저한 진상규명 및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체육계에 만연한 카르텔을 깨는 조치가 우선되어야 한다. 현재의 구조에서는 시합 출전권, 대학입시, 실업팀 스카우트 등 선수들의 오늘과 미래의 삶이 코치와 감독에게 달려 있다. 이러한 숨막히는 위계에 의한 억압적인 관계에서 선수생활을 지속하려면 어떠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그동안 성폭력 문제를 방관해온 각 연맹과 대한체육회의 책임 또한 엄중하다. 피해 선수들이 불이익과 가해자 복귀에 대한 두려움 없이 담당자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자신의 인권침해 상황을 상담·신고할 수 있는 시스템조차 갖추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엘리트 선수 중심의 우리 체육계의 현실 속에서 ‘운동만 하는 선수학생’들을 기록 제조기로 길러내는 한, 반복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모든 성폭력 사건은 불평등한 관계와 폭력적인 문화 속에서 발생하고 유지·존속된다. 이 사건은 조재범 한 사람을 체육계에서 영구제명시킨다고 해서 지속적인 폭행과 성폭력이 가능했던 체육계의 관행과 문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뼈아프게 일깨워주고 있다. 더 이상 사후약방문이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를 면밀하게 파헤쳐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

<이미경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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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3000m계주 금메달리스트 심석희 선수(22)가 조재범 전 국가대표팀 코치(38)로부터 상습적으로 성폭행당했다고 폭로했다. 성폭행은 심 선수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평창 올림픽 개최 직전까지 4년간 계속됐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체육대학교와 국가대표선수촌 빙상장 라커룸 등 국가체육시설에서도 버젓이 자행했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조 전 코치는 심 선수 등을 주먹과 아이스하키채 등으로 상습 폭행한 혐의로 지난해 9월 법원으로부터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인물이다. 그가 체육 지도자라는 지위를 이용, 폭력을 일삼고 성폭행까지 자행했다니 참담하다. 조 전 코치는 성폭행 의혹을 부인하고 있지만 심 선수가 강간·상해 등의 혐의로 그를 고소한 터라 수사와 재판을 통해 진실은 곧 드러날 것이다.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왼쪽)이 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조재범 전 코치의 성폭행 혐의 관련 대책을 발표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심 선수는 성폭행 피해사실을 끝까지 숨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여성으로서 견뎌야 할 고통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 가족들이 입을 상처 때문에 최근까지도 혼자서 감내해 왔다는 것이다. 심 선수는 지난달 17일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계속되는 폭행으로)‘이러다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울먹이기까지 했다. 그는 그러나 성폭행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피해가 너무 크고, 앞으로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성폭행 피해사실을 밝히기로 용기를 냈다고 한다. 그의 용기 있는 고백에 박수를 보낸다.  

여자쇼트트랙의 세계적 스타가 이렇다면, 일반 선수들이 당하는 고통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대한체육회에 접수된 폭력·성폭력 피해 신고·상담건수는 지난 한 해 동안 348건에 달했다. 이 중 성폭력 신고·상담건수는 93건이다. 대한체육회는 그러나 수사 의뢰나 고발은 단 1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8일에는 ‘2018년 스포츠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내놓으면서 “스포츠계 성폭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뒤늦게 “민간주도 특별조사를 진행하고 예방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사후약방문식 처방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심석희 성폭행 의혹 사건’이 아닌 ‘조재범 성폭행 의혹 사건’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성범죄 피해자가 입을 수 있는 2차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가해자의 이름으로 사건 프레임을 짜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정의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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