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청구권협정'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08.06 [김민아 칼럼]유코, 넌 ‘아베의 일본’과 다르지?
  2. 2017.01.17 조센진의 거짓말

유코!

오랜만에 불러본다. 22년 전 런던에서 만났을 때를 기억하니? 영어 실력이 뛰어나던 너는 사려 깊고 다정했지. 귀국 후 연락이 끊겼지만 늘 고마운 사람으로 남아 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너를 다시 떠올린 건 한·일관계 때문이야. 최근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제외하며 ‘경제 전쟁’을 선포했다. 한국 정부도 상응 조치를 취하고, 시민들은 일본 상품 불매운동에 나서고 있어. 아마도 너를 비롯해 대부분의 일본 시민은 지금 한국이 무엇에 분노하는지 잘 알지 못할 거야. 1965년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며 맺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과거사 문제는 마무리된 것 아닌가, 왜 뒤늦게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 배상을 요구하는가 답답해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한국 어르신의 삶에 대해 들려줄까 해.

신천수님은 17세이던 1943년 일본제철의 오사카제철소 노무자로 가게 돼. 돈도 벌고 기술도 배우리라 기대했는데 실상은 달랐어. “기숙사 창에는 쇠창살이 끼워져 있고, 문에는 망보는 사람이 있었다.”(신천수님 진술서) 일본제철은 임금도 주지 않고 강제 저축을 시켰어. 통장과 도장은 사감이 보관했지. 일은 위험하고, 식사는 보잘것없고, 송금도 할 수 없으니 도망치고 싶어했다. 그런데 동료에게 ‘도망가고 싶다’고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것 같은” 폭행을 당하고 만다. 사실상 노예의 삶이었지.

1945년 해방 후 귀국한 신천수님은 1997년에야 다른 피해자 여운택님과 함께 일본 법원에 소송을 내게 돼. 일본제철(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미지급 임금과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패소했지. 신천수·여운택님과 다른 피해자 2명은 2005년 같은 취지의 소송을 한국 법원에 냈어. 1·2심은 일본 법원과 같았으나, 2012년 대법원은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며 원심을 파기하지. 2013년 서울고법이 원고들에게 1억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하지만 피고 기업이 불복하며 사건은 다시 대법원으로 가게 돼. 일본 눈치를 본 박근혜 정권과 당시 대법원이 야합하는 바람에 재상고심은 5년이나 지연된다. 지난해 10월 현 대법원이 원고 4인의 승소를 확정하지만, 신천수님 등 세 분은 세상을 떠난 뒤였어.

일제 강제징용 생존 피해자 이춘식씨가 10월30일 신일철주금(구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휠체어를 탄 채 대법원 청사로 향하고 있다. 소송은 13년 만에 피해자 승소로 확정됐다. 이준헌 기자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 판결에 불만을 품고 반도체 소재 등 3개 품목 수출규제에 돌입했어. 이달 2일에는 전면적 화이트리스트 배제까지 강행했다. 입법·행정·사법권이 분립된 한국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정경분리 원칙을 외면한 행태이지. 아베 신조 총리는 “한국이 ‘징용공’(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국제적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 명확하다”고 했어. 아베를 필두로 한 일본 우익은 ‘청구권 협정을 통해 개인청구권도 일괄 해결됐다’며 한국이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하지만 사실과 달라. 1991년 야나이 슌지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은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밝혔고, 지난해 11월 고노 다로 현 외무상도 이를 인정했어. 약속을 어긴 쪽은 어딜까.

한국 시민의 'NO아베' 움직임에 연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4일 오후 신주쿠(新宿) 아루타 마에에서 반(反) 아베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옛 피식민국가 시민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는 일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역사와 정직하게 대면하고,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는 일은 품격 있는 결단이지. 독일은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을 수도 베를린에 세우고 거듭 반성함으로써 존경받는 국가가 되지 않았니. 난 ‘아베의 일본’을 거부하는 ‘다른 일본’에 희망을 걸어보려 해. 지난 4일 도쿄에서 한국의 ‘NO 아베’ 움직임에 연대하는 일본 시민들의 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저명한 지식인들이 대한국 수출규제 철회 촉구 서명운동을 벌이고, 국철지바동력차 노동조합도 아베 정권의 행태를 “폭거”라고 비판했어.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강제중단되자 일본 문화·언론계에서 분노한다는 소식도 듣는다. 아직 소수이겠으나 이분들의 한마디, 한 걸음이 변화와 연대의 시작이 되리라 믿어.

보편적 인권을 부인하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깨뜨리는 ‘아베의 일본’에 나는 단호히 반대한다. 그들의 망동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생각이야. 가쓰시카 호쿠사이(19세기 우키요에 대가)와 구사마 야요이(현대미술가)의 미감(美感)을 사랑하지만, 도쿄에는 가지 않으려 해. 다만 약속할게. 혹여 한국인 누군가가 무고한 일본 시민을 혐오하거나 모욕한다면 강력히 비판할 거다. 폭력적·배타적 국수주의가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 아래서만 승리할 수 있으니까. 아베의 방식으로는 아베를 극복할 수 없으니까.

언젠가 우리 함께 서울 북촌과 도쿄 우에노공원을 거닐 수 있기를 바란다. 너와 내가, 또 다른 일본과 한국의 시민들이 정의와 평화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는다면 그런 날이 곧 오리라 믿어. 그때까지 강건하기를.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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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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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이맘때쯤 신년회가 있었다. 예약한 중국집이 번화가에서 떨어진 곳이라 오후 5시45분에 전철역에서 모여 가기로 했다. 5시35분쯤 도착하니 개찰구 앞에 상당수가 있었고, 5시44분에 마지막 멤버까지 40여명이 모두 모였다. 당시 어느 변호사단체의 옵서버이기도 했다. 여름 총회에서 2년 임기 회장을 새로 뽑았다. 이날 이사진이 모여 2년치 이사회 날짜도 정했다. 수첩들을 펼쳐 약속이 없는 날짜를 맞춰 가는데, 다다음해 봄의 약속이 잡힌 사람이 여럿이었다. 

“조센진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 시절 동네 술집 옆자리에서 들려온 얘기다. 나의 변변찮은 일본어를 알아채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역사와 정치를 시비하려는 것이었을 테다. 그리고 올해 한국에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에 재협상을 요구한다고 하니, 일본 인터넷에 비난이 들끓는다. “처음부터 조센진과 약속 따위 하는 게 아니었다.”

‘정의의 회복’이라는 낭만적인 발상의 재협상 요구는 ‘조센진은 거짓말을 한다’는 프레임에 뛰어드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프레임은 ‘약속의 절대성’이 아니라 ‘청구권의 유효성’이다. 2015년의 한·일 위안부 합의는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의 결함을 반세기 만에 되풀이한 것이다. 두 가지 모두 국가가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킨 협약으로, 이러한 약속은 있을 수 없다는 게 현대 국제사법의 상식이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가 야만적인 합의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2차 가해’를 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니라고 우기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1년 동안 고령인 7명의 할머니들은 가해자들의 진정한 사과의 말 한마디 못 들어보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정기 수요시위에서 일곱 명 할머니들의 사진 앞에 시민들이 바친 꽃이 정부를 대신해 고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듯합니다. 이상훈 기자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이렇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8일에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2조1항). 이후 1980년대까지 군사정권이 계속됐고, 일본에 소송도 제기하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 위안부와 징용공들의 소송이 시작됐다. 하지만 2000년대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모두 패소했다. 주요한 이유는 한일청구권협정이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한국이 식민지 조선을 대표해 최종적으로 청구권을 소멸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사법부의 입장은 기존 행정부의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아무리 부정해도 일본의 사법부와 행정부는 유난히 긴밀하다).

사실 1990년대까지 일본 행정부는 일본 국민이 피해자로서 제기한 소송에서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주장했다. 1963년 일본인 원폭피해자들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샌프란시스코 협정에도 불구하고 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했다. 또 시베리아에 억류된 일본인들이 소련 정부에 제기한 소송에서도 1956년 일·소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배상 요구가 가능하다고 법무성이 밝혔다.

일본 사법부의 청구권 소멸론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7년 최고재판소는 “국가 간의 행위로 개인의 실체적 청구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고, 재판상 청구권이 소멸된 것”이라고 했다. 중국인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다. 이에 따라 니시마쓰 건설은 화해 형식을 빌려 자발적으로 보상했다. 중국과 일본 역시 1972년 공동성명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했다.

상대로 나눠서 보면 일본은 미국, 소련, 중국과 달리 한국에만 청구권 소멸을 주장한다. 여기에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이란 불필요한 문구가 한몫한다. 하지만 그 어떠한 문구로도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2015년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도 마찬가지다. 위안부 같은 반인도적인 문제는 더더욱 그렇다. 합의는 무효다.

사회부 | 이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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