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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3.11 [정동칼럼]가부장의 낡은 옷을 벗어던져라!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그 ‘남자’는 평생 어머니와 여형제, 아내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물!” 말 한마디면 족했고, 불쾌한 눈빛 한번이면 그만이었다. 눈을 뜨면 그날 입을 양복과 와이셔츠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출장이라도 갈라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필요한 용품과 옷가지들이 용도별, 날짜별로 정돈된 가방을 건네받았을 것이다. 바쁜 일정에 몸이라도 상할까 좋다는 음식과 보조식품을 귀찮을 정도로 대접받았을 것이다. 먹다 만 물컵, 벗어던진 속옷, 여행지에서 온 빨랫감, 남긴 음식은 머릿속에 없을 정도로 집 안은 늘 반짝거려야 했을 것이다.

남자란 그저 바깥일만 잘하면 된다고 배웠기에, 그 역할에 충실했던 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열심히 공부했고, 죽어라 돈을 벌려고 했고, 세속적 성공을 피터지게 좇았다. 한 몸 불살라 가족을 부양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욕구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추구해 본 적도 없다. ‘남자의 욕망’이라 불리는 것들을 열심히 따라 했을 뿐이다. 다른 여자가 집 밖에서도 자신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고, 마음껏 만지고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여자들이 있다고 생각했고, 어리고 예쁜 여자가 술을 따라야 맛이라고 보고 듣고 따라 했을 뿐이다. 돈으로든, 권력으로든, 성으로든, 무력으로든 여자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남자다운 것이라 배웠을 뿐이다. 헌신적으로 가족을 돌보고 집안을 건사하는 존재, 세상의 주인공인 나를 보조해 빛을 내는 존재, 남자의 성공에 굴비 엮이듯 줄줄이 따라오는 존재, 윽박지르면 조용히 눈을 내리까는 존재, 흥을 돋우는 존재, 자식을 낳아주거나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 여성은 그렇게 타고났다고 알았다.

3·8 세계여성의날 축사로 여당 출신의 국회의장이 했다는 발언은 그래서 놀랍지 않다. “요즘 서러운 게 남자입니다. 오십 넘은 남자들에게 제일 필요한 게 무엇인지 물어 보세요. 첫째 내 마누라, 둘째 아내, 셋째 와이프, 넷째 집사람, 다섯째 애들 엄마”(여성신문, 2019년 3월8일자)라는 말은 아마도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배우 브리 라슨이 출연한 영화 '캡틴 마블'의 한 장면. 마블스튜디오 제공

딱한 건 그 남자의 아들들이다. 아버지의 돈과 사회적 지위, 감히 흉내 낼 수도 없을 정도의 권위에 짓눌려 숨이 막히고 주눅 들고 때론 반항해 왔지만, 자라면서 보고 들은 아버지의 행동은 어느새 온몸에 각인돼 있을 것이다. 몸에 맞지도 않은 누더기 옷을 물려받은 아들은 어설프게 아버지 흉내를 내보려 하지만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처럼 열심히 일해도 그만큼의 성취가 사회적 대가로 따라오는 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현재는 미미하되 도래할지도 모를 미래를 담보로 한 남자에게 온 생을 걸었던 어머니 세대의 여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동적이고 나약하고 남성들에게 헌신적이었던 여자들은 이제 똑똑하고 진취적이며 자기 욕구에 충실하다. 아버지들의 쾌락추구 방식은 성폭력, 성매매, 성착취로 명명되고 범죄행위가 되었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고 온 가족의 헌신적 지원을 통해 남자 하나 성공시키던 방식은 이제 적폐가 되었다. 남녀 간 역할이 다르고 여자가 마땅히 감수해야 된다고 믿었던 일들은 성별직종분리, 채용성차별, 경력단절, 유리천장, 독박육아, 돌봄노동, 성별임금격차, 승진차별로 비판받는다.

그래서 억울하다. 혼란스럽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버지를 상대로 대적할 자신도, 구조적 모순을 바꿀 용기도 없는 이들은 그저 각종 온라인에서 투덜거리거나 징징대거나 방향 모를 분노를 표출하거나 특정인들을 지목해 악의적 댓글을 달거나 ‘역차별’이라는 논리에도 맞지 않는 말을 쏟아낼 뿐이다. 반면 동시대 여성들은 자기 경험을 들여다보고 해석하고 사회를 바꾸기 위해 연대하고 행동하고 있다. 역량에 걸맞은 사회적 참여와 분배, 인정을 당당히 요구한다.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고 위계 짓는 구조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바꾸려 한다. 공적인 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설파하고 집합적 행동을 주도한다. 3·8 세계여성의날을 기념해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35회 여성대회가 그렇게 다채롭고 활기찰 수 있었던 배경이다.

차분히 생각해 보자. 세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 여성들의 성장과 그에 걸맞은 권리 향상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진행된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다. 신자유주의의 첨병, 할리우드가 왜 <캡틴 마블> 같은 영화를 만들겠는가. 언제까지 먼지 폴폴 날리는 봉건가부장의 낡은 옷을 걸치고 온라인 골방에서 ‘페미니즘 정신병자’를 외치고 있을 것인가. 죽을 때까지 부모가 당신을 돌봐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혼자 살 것인가, 동세대 여성들과 동무처럼 행복하게 살 것인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을 위해 선택할 때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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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